주일낮예배

제목내게 먹이시며2024-02-27 10:59
작성자 Level 10

2019년 6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내게 먹이시며

본문에스겔 3;1-3

 

서론)

 

지난 금요일요양원에 계시는 강영자 권사님과 이동우 집사님을 뵙고 기도해 드리고 왔습니다.

마침 점심 식사 시간이라서 두 분 다 식사 하시는 것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올 수 있었습니다.

요양원이라는 곳이 어디 집만큼 대우를 받겠습니까만 그래도 요양 보호사들이 어르신들의 식사를 돕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들이 제대로 거동조차 하시기가 불편한 어르신들을 매 끼니때마다 일일이 보듬는다는 것이 아무리 본인들의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힘들고 벅찬 일인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기에 마음을 다잡이 하였지만 그래도 권사님과 집사님의 식사를 돕는 요양보호사들의 손짓 하나하나가 왠지 모르게 아쉽게 느껴진 것은 식사 돌보미로서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모습이 그려져서입니다.

얼마 전식당에서 젊은 엄마와 함께 식사를 하는 세돌 남짓 지나 보이는 남자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천방지축으로 식당을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타이르지 않는 부모의 모습에 쯔쯔 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허나 이 남자 아이의 엄마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들에게 밥 한 끼라도 더 먹이기 위해 혈투에 가깝게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아주 옛날기억은 이제 희미하지만 저를 먹이시기 위해 저렇게 하셨을 어머니를 떠올리다 보니 눈가 주위가 뜨거워졌습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음식을 먹이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불과 얼마 전 자녀를 6개월 간 방치해 숨지게 한 비정한 젊은 부부의 기사가 올라와 많은 사람들에게 공분을 샀지만 그런 정신병자들을 제외한 모든 정상적인 부모가 자녀에게 향한 마음은 바람에 꺼질까돌에 넘어져 무릎이 까질까음식을 먹일 때는 체할까 등을 두드리며 정성을 다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헌데 이게 어찌 우리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한정되겠습니까?

성경은 아주 여러 곳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새벽에 읽은 예레미야 1장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택하시면서 언급하셨던 말씀을 읽다가 뭉클했던 부분이 있어 소개합니다.

예레미야 1:5절을 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급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예레미야가 무엇이라고 반응합니까?

이어지는 예레미야 1:6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황망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맡기실 때 그 임무를 부여받은 당사자의 부담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부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행하셨던 반응을 마저 보십시다.

예레미야 1:7-9절을 읽어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저는 이 구절 중에 특별히 9절에 표현하고 있는 너무나도 감동적인 주님의 약속이 얼마나 큰 감격적인 은혜인지 단언해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보면 정말로 큰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고 말씀하셨다보아라내가 방금 너의 입속에 나의 말을 넣어 주었다내가 손수 넣어 주었다내가 한 일을 보고 있느냐?”

다시 복기 합시다.

내가 너의 입속에 나의 말을 넣어 주었다.”

어떤 모습이 연상됩니까?

마치 우리들의 부모님이 우리들이 어렸을 때음식을 넣어주시던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런 표현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 중에 또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 주일 설교를 통해 구약 특별 강좌의 주제 절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는 입을 벌리는 사모함과 더불어 유불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편식을 버려야 함을 공부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꼭 이런 아름다운 말씀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같은 구절을 통해 또 다른 은혜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RSV는 이 구절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So I opened my mouth, and he gave me the scroll to eat.”

그렇습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먹은 것이 아니라 나는 먹은 수동적 존재에 불과했고 나에게 두루마리를 먹여주셨던 분이 존재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번역에서 아주 선명하게 알 수 있는 영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자의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셔야 먹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저는 이 교훈에 대하여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 교훈은 잘 곱씹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보십시다.

성도들이 오늘 주일 예배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목사에게서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또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단 데 비해 어떤 성도에게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무색의 싸늘함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교회는 새벽예배를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통독합니다.

분명한 같은 말씀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허나 A라는 교우는 그날 읽은 말씀이 히브리서 4:12절에 기록된 그대로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능력이 말씀으로 나를 감동시키지만, B라는 성도는 전혀 그런 감동이 없이 성경을 무색무취하게 읽고 돌아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고 존재하는 것일까요?

단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구절에 국한하여 적용하여 말씀드리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A는 하나님이 먹이셨지만, B는 하나님이 먹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먹이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말씀을 주시고 깨닫는 은혜의 감동도 더불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읽게 하시고깨닫게 하시고울게 하시는 역동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나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들이 조금 더 세밀하게 받아야 할 영적인 도전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하나님이 두루마리를 먹일 수 있는 존재를 알게 해주는 기막힌 구절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두루마리를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전제 조건이 있음을 고지합니다.

무엇입니까?

입을 벌리는 자입니다.

무엇이 느껴집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입을 벌리게 하시지 않는다는 점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못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실 수 있지만 입을 벌리고 안 벌리고는 사람의 자유에 맡기십니다.

가끔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리모트 컨트롤로 좌지우지하는 로봇 기술자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입을 벌리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인 우리들의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이제 답을 제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입을 벌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 먹은 말씀을 소화시켜 그대로 살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25-28절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앞서 주님이 율법 교사들과 펼친 미묘한 신경전 이야기입니다.

당시 눈에 가시와 같은 불편한 존재였던 예수께 율법 교사들이 나와 그 분을 무너뜨리기 위한 고도의 논쟁거리를 테이블에 올려놓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행위에 대한 율법의 표상처럼 여겼던 부류인 율법 교사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도발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그로기 펀치를 날리신 장면이 이 구절에서 포착됩니다.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주님이 반응하신 내용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부분을 헬라어 원전에는 포스 아나기노스케이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구절의 번역은 잘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은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구절의 문자적인 의도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읽은 것이 무엇이냐?”를 질문 한 것이 아니라 읽었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로 수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에게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구절의 뜻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그 말씀에 기록된 대로 어떻게 하면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대처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해서 이 구절에서 주님의 결론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율법학자들의 의미 해석은 틀린 곳이 없었습니다.

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것처럼 완벽한 답변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지성적 답변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고 난 뒤에 삶의 답변을 요구하신 것이기에 그 다음에 기록된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먹은 뒤에 가져야 할 그리고 행하여야 할 최고의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입을 열어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말씀을 읽어 명쾌하게 해석하여 지성적으로 만족한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입을 열어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먹은 뒤에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이루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말씀 톺아보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크리스천 연합신문에 우리 교회 사역이 기사화되었다고 담당기자가 저에게 기사 전문을 보내주었습니다.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은 제천 세인교회(이강덕 목사)가 성도들과 시민들을 위한 유익한 섬김 사역에 나서 귀감이 되고 있다세인교회는 지난 9일부터 6월 한 달 동안 구약 성서 톺아보기’(3:3)라는 주제로 온 성도가 함께하는 구약 특별강좌를 시작했다. ‘톺아보다는 말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보다라는 의미로 신약에 비해 소홀할 수 있는 구약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짚고 가자는 취지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중략이어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고 또 다른 10년을 계획하는 프로젝트로 성도들 사이에서 신약보다는 홀대를 많이 받아 잘 읽혀지지 않는 구약 성서 톺아보기’ 강좌를 계획하여 6월 한 달 동안 4주에 걸쳐 진행하려고 한다면서 국내 신학학계에서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구약학자들이 세인교회를 위해 귀한 시간을 할애해줬다우리 세인교회의 성도들을 지성적 기름부음으로 충만하게 할 이 사역을 위해 중보하고 있고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이 목사는 말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이 사역은 교우들이 어떻게 체감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제천이라는 지역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측면에서 볼 때도 대단히 의미 있는 교회의 질을 높이는 사역이라고 교계 일간 언론도 동의해 준 기쁨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막상 이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께 준비 기도를 한 것이 있습니다.

이 기도였습니다.

질적 수준 높은 사역을 진행하게 하셨사오니 이 강의를 듣는 일체의 세인 지체들이 질적 수준을 높여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게 하옵소서.”

영성 신학자 유진 피터슨 목사는 자신이 쓴 이 책을 먹으라’ 에서 이런 논점을 주장했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세계는 분명한 인격성을 가진 하나님의 세계다만에 하나 이 세계에 인격적으로 동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가 낯설고 우리의 선입관이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로 크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p,122-123)

저는 유진 피터슨 목사의 이 갈파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그리고 지지합니다.

성경 말씀을 인격적으로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는 것은 내가 그 말씀이 낯설고 기호에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대로 맞추어 사는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기를 결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먹여 주실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이정화 집사님의 남편 되는 김학철 형제를 매장으로 찾아가 심방했습니다.

그 동안 김학철 형제를 지인으로 교우들 모두가 그에 대한 칭찬이 너무 커서 저 역시 도대체 어떤 인품의 사람이기에 이 정도일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심방했습니다.

그리고 약 10여 분 정도 아주 짧은 만남을 갖고 돌아오면서 이런 소회가 저에게 임했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감동은 정말로 똑같구나 하는 감동이었습니다.

김학철 형제에게 다시 교회에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을 하고 기도해주고 나오면서 그가 종에게 해주었던 한 멘트가 귓가에 울렸습니다.

목사님아내를 통하여 세인 교회와 목사님과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에도 몇 번 씩 듣습니다너무 좋은 교회좋은 목사님 부부라는 말을그런데 기다려주십시오제가 교회를 나가는 사람으로 삶에서 부끄럽지 않게 주변 정리를 하고 기쁨으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선다는 것에 부끄럽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제가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여정 안에 들어오시면 그 정리는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아들이 연세대학교 대학원 전형에 최종 합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아들진정한 신학적 지성은 엎드림 속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날마다 깨닫는 것이다분투해 주기를 바란다축하한다.”

어느 것 하나 그리스도인으로 말씀과 삶이라는 공식에서 배제되거나 유리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말씀을 먹으면 먹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백성에게 하나님은 중단 없이 말씀을 먹여 주십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회에 속해 있는 교우들 중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입을 벌리는 백성들이 되기를 바라며 그 벌린 입으로 하나님께서 날마다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는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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