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입을 벌리니 본문: 에스겔 3;1-3 서론) 정원 쪽에 단독 주택이 하나 있습니다. 근래 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 주택에서 키우고 있는 개 때문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소리에도 꽤나 민감한 청각을 갖고 있는 그 개가 사명감에 불타고 있다는 고민입니다. 제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녁에 운동을 다녀와서 샤워를 하면 그 소리까지도 듣는 개는 영락없이 짖어대는 용감함을 비롯해서 동네에서 저녁에 벌어지는 웬만한 대소사에 관여하여 늦은 시간까지 본인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바람에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해서 얼마 전부터 저의 개인적인 기도 중에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한 번 외면한 적이 없으셨던 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삼복에 저 이웃 친구를 거두어 주옵소서.” 웃자고 한 소리이니까 개 사랑 협회의 회원들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개는 청각에 아주 예민합니다. 그것은 개의 본능입니다. 하나님께서 개를 창조하실 때 개가 개다울 수 있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개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성에 충실한 것이며 또 다른 한 시각에서 조명하자면 건강한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물인 개도 자기의 본성에 그렇게 민감한데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고 지으실 때 가장 보기에 좋았다고 탄성을 지르셨던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민감해야 하는 것일까?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이 질문에 접근하여 무언가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배경은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윗의 후손이었던 유다 신앙공동체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멸망이라는 비운을 안고 바벨론으로 질질 끌려가 포로가 된 비극의 현장에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에스겔이라는 젊은 하나님의 사람이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압도되어 환상을 보는 장면으로 에스겔 예언서는 시작됩니다. 여호야긴이 사로잡힌 지 5년이 된 해라고 에스겔 1:2절은 공지합니다. 이 시기를 월력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주전 593년이 됩니다. 에스겔의 탄생 해를 노트르담 성서학 교수인 조셉 블렌킨솝 박사는 자신의 에스겔 주석서에서 주전 623년경으로 보고,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던 시기를 주전 597년으로 산정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계산한다면 에스겔의 나이는 불과 30세 밖에 되지 않은 젊은 제사장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왜 에스겔의 나이를 추적했습니까? 에스겔이 하나님의 압권에 이끌려 그발 강가에서 본 환상은 개인의 주관성에 입각한 허무맹랑한 신비주의적인 허상을 볼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대변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적인 확실성과 에스겔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지성을 토대로 보고한 내용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기록된 1-2장의 내용을 아울러 선 이해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소개합니다. 1장에 기록된 환상 내용을 함축적으로 정리하자면 세 가지의 한자숙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일 징신대 이종록 교수는 밝히고 있습니다.(“그 말씀”, 2006년 5월,pp,29-31.) ⓵ 신묘막측(神妙莫測) ⓶ 평지풍파(平地風波) ⓷ 전광석화(電光石火) 이런 초자연적인 상황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을 보고 또 하나님의 일하심을 봅니다. 그런 뒤에 하나님은 에스겔 2장에서 드디어 현현하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에스겔에게 당신의 백성인 유다 신앙공동체의 패역함을 고발합니다. 2:1-5절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저지른 패역무도한 공동체적인 범죄를 상기시킵니다. 문제는 이런 패역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전하라고 압박하십니다. 문제는 말씀을 전할 때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다는 점입니다. 에스겔 2:4-7절을 읽어보십시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병 주고 약주는 듯한 인상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잘 안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겔 2:6절 전반절) 마치 형극의 길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약속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6절에서 무려 4번에 걸쳐 격려하십니다. 이 격려와 함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더불어 명령하신 내용이 2:8-10절에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무슨 말이었습니까? 앞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글을 읽은 뒤에 그 두루마리를 입을 벌려 먹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글씨들입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들 천지였습니다. 이렇게 명령하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재차 거듭해서 재촉하시는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 3:1-3절입니다. 다시 한 번 이상의 전 이해를 토대로 본문을 복기하겠습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본문의 적절한 해석을 위해 다시 한 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유다의 패역한 죄로 인해 앞으로 당하게 될 재앙과 슬픈 노래 부름과 통곡의 메시지가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읽은 뒤에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적혀 있는 메시지의 우울함으로 인해 머뭇거리고 있는 에스겔에게 재차 독촉하십니다. 발견한 것을 먹으라고. 그러자 에스겔이 입을 벌렸다고 했습니다. 입을 벌린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친히 그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기까지 합니다. 먹여주시는 하나님은 친절하게도 에스겔에게 이런 당부를 아끼지 않습니다. “네 배에 넣고, 네 창자에 채우라.” 그렇게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는 하나님의 그 먹이심이 끝나자 에스겔이 마지막으로 본인의 소회를 밝힙니다.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제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주 예민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구절과 아주 비슷한 요절이 요한계시록에도 실려 있습니다.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10:9-10절입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어간, 그 역시 에스겔처럼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요한이 거대한 천사를 본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거대한가 하면 그 천사의 한 발은 대륙 쪽에 또 다른 한 발은 바다 걸쳐 있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그 천사의 손에는 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 천사는 요한에게 강력한 권위로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던 요한은 그 천사에게 그 책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요한의 요청을 받은 천사는 그 책을 요한에게 건네면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여기에 있다. 이 책을 받아먹으라. 먹을 때 네 입에서는 달게 느껴지겠지만 네 배에서는 쓸 것이다.” 에스겔의 환상과 요한계시록의 환상에 나타난 공통분모를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두루마리와 책을 먹었던 에스겔과 요한의 느낌 중에 그것을 먹을 때 꿀처럼 달았다는 느낌입니다. 여기까지의 보편적인 이해에 토를 달 것이 없음은 거의 모든 독자들에게 동일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내용이 보입니다. 요한은 배에서 쓰다고 표현했습니다. 에스겔 본문인 3:1-3절까지의 내용에는 그런 문구가 보이지 않지만 이어지는 3장 전반에 걸친 내용과 설명 드린 것처럼 2:6절에 기록된 두루마리 안팎에 기록된 내용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라는 문구에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역시 에스겔이 먹은 뒤에 느낌은 배에서 쓰디쓴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행하는 설교자의 의도를 우리 교우들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구약 특별 강좌의 주제 절을 지금 소개한 에스겔 3:3절로 정했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자칫 잘못하다가 3절의 메시지 이해를 이렇게 곡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니 입에서 달기가 꿀 같았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에게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은혜가 꿀같이 임한다.”고. 시편 119:103절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저는 시인이 노래한 시편 119:103절을 100% 동의하고 확신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한 시편 119편과 오늘 본문과 사도요한 밧모 섬에서 본 입에 달다는 소회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묵상)할 때 주어지는 은혜로 표현한 달다는 고백은 조금도 이견의 여백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스겔과 사도요한이 경험했던 두루마리를 먹고, 책을 먹을 때 느꼈던 쓰디쓴 감회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쓴 느낌은 단 느낌에 비해 깊이가 있는 묵상이기 때문입니다. 단 것은 입과 혀를 자극해 줍니다. 그러나 쓴 느낌은 입과 혀를 통과할 때부터 시작하여 이후에 몸을 통해 나타나는 전체적인 체감의 소회입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단 것은 건강에 해롭지만, 쓴 것은 건강에 유익하다고. 저는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할 때마다 단 것을 뛰어 넘어 쓴 것까지 느끼는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말씀의 지성적 능력을 공유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그리고 들을 때 단 것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쓴 것을 해석할 수 있는 거룩한 욕심과 열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한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 나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겠다는 편식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입을 벌렸다는 에스겔의 고백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전술했듯이 에스겔이 두루마리에 적힌 글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이미 에스겔의 옷매무새를 단단히 할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이 슬픈 통곡과 애곡과 재앙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 바벨론에 끌려와 있는 동족에게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 길은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하는 형극의 길이라고까지 예고해 주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이런 길을 가는 것, 이것을 감당하겠다는 것이 입을 벌렸다는 것은 어디 이게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에스겔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입을 벌렸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감당하겠다는 고백이지 않습니까? 단 것만 취하지 않고 쓴 것도 취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이 아닙니까? 취사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순종하겠다는 결단이자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나에게 유리하고 달고 좋은 것은 먹고, 그렇지 않은 쓴 것을 뱉어내겠다는 현대적인 이기적 그리스도인의 습성을 보기 좋게 박살내는 선언이 에스겔의 고백을 통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친한 동기 목사 내외가 제천에서 안식월을 보내게 되어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보수적 감성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무식한 근본주의적인 보수성을 비평하는 균형 잡힌 영성과 지성을 갖춘 친구입니다. 교제를 하다가 이런 토론이 있었습니다. 친구도 저와 같이 엇비슷하게 30년 이라는 세월을 목회 현장에서 교우들과 부대끼며 사역을 했기에 느끼는 감흥이 저와 별 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는 목회에 대하여 신중한 편이었고, 많이 고민하며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10년의 목회 기간 동안 다른 목양의 많은 스펙트럼들은 내려놓기로 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끝까지 붙들고 가련다. 그것은 예배와 말씀(설교)에 목숨 거는 것이다. 목양의 여타 다른 영역들은 변화무쌍하지만 예배와 말씀 전함은 끝까지 영원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끝까지 승부수를 던지려고 한다.” 친구의 말을 귀담아 듣다가 동의했습니다. 동의하면서 저도 한 마디를 거들었습니다. 친구와 제가 예배와 말씀 전함에 목숨을 걸려면 한 가지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말입니다. 목회자부터 말씀을 취사선택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 용기는 마치 에스겔이 거북한 하나님의 신탁도 받아먹겠다고 입을 벌린 것과 같은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근래 모 목회자의 무지하기 그지없는 발언으로 인해 가뜩이나 교회 공동체의 신뢰가 떨어진 아픔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행해졌습니다. 도대체 왜? 라는 비난을 그에게 퍼붓기에 앞서서 곰곰이 나를 성찰해 보았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러다가 지난 수요일 구원 그 이후 반의 텍스트인 ‘잊혀진 제자도’ 를 마감하는 시간,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가 지극히 지성적, 영성적인 기초를 토대로 한 엔딩 멘트가 생각났습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세상을 고칠 것인가? 아니다. 교회를 고칠 것인가?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공급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인도할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다. 교회를 고치지 말라. 가면서 당신이 해야 할 첫째로 할 일은 ‘나를 고치는 일’이다.”(p,271) 그렇습니다. 입을 벌리려면 나를 고쳐야 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아멘을 하고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말씀에는 등 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라는 주님의 권고에 입을 벌릴 리 없습니다. “잠깐만요. 메뉴를 골라 본 뒤에 결정할게요.” 참담한 형식주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명목적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 번 경종하며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말씀을 취사선택하지 마십시다. 어떤 말씀이든 입을 벌리십시다. 그것이 쓰면 쓴 대로 삼키고, 달면 단 대로 삼키십시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말씀대로의 삶을 되새김질함으로 나타내십시다. 그것이 입을 벌린 그리스도인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설교 원고를 완성하고 나니까 제 기도를 중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기도를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하나님, 저 앞 동네에 있는 아무개 씨 개가 이번 삼복을 잘 넘기게 해 주십시오.” 난 오늘부터 진행되는 구약 특별 강좌 집회가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이 입을 벌려 내 배에 채우고 창자에 메우는 강력한 소화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내 모든 정성 내 모든 정성 주만 위해 바칩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사 영원토록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이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주만 따라 가렵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사 언제까지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만 찬양 하렵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사 할렐루야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