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24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4:12-20 제목: 끝까지 가야 가는 것입니다. 서론) 작은 마을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에게 신통력이 있어 환자가 그의 곁에만 가도 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또한 두 장소에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의 표정은 평화롭고 고요했습니다. 부족의 연장자들은 어린 능력자에게 신과 우주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간곡히 말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간청했습니다. “신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준다면 오렌지 한 개를 주마” 어린 성자가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신이 없는지 말해 준다면 제가 오렌지 두 개를 드리지요.”(p,227) ‘씨알 아쉬람’이라는 기독교 명상 센터 소장으로 있는 김진 박사가 쓴 ‘간디와 대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글에 나오는 어린 성자는 힌두이즘의 성자로 묘사되었지만 이 글은 그대로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믿는 주군이신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거주지가 어디입니까? “ANYWHERE”입니다. 어디든지 계십니다. 주님이 거주하지 않는 공간적인 여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이렇게 갈파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하늘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이다.”(김기석, “오래된 새 길”,p,92) 한 가지만 더 나누어 보십시다. 그렇다면 같은 흐름으로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시간적인 장소는 어디입니까? “ANYTIME”입니다. 어느 때나 계십니다. 언제나 계셨고, 또 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성경적인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여러 차례 인용했던 구절이지만 또 한 번 곱씹겠습니다. 사무엘상 17:36-37절 말씀입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골리앗이 사울의 군대를 유린할 때 마침 그 전장에 우연히 나간 다윗이 그 기막힌 상황을 보고 사울에게 직접 본인이 나가 골리앗과 맞장을 뜨겠다고 천명하며 회고한 메시지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목동 다윗을 위해 해주셨던 반응입니다. “건져내셨던 하나님”은 또 “건져 내실 하나님”이라는 다윗의 선포 속에 ‘ANYTIME’의 하나님을 봅니다. 왜 오늘 설교의 서두에 시공간에 영원히 거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논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최대한의 유익을 주는 어느 장소에만 계시고, 어느 시간에만 계신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시작한 그 순간부터 끝까지의 시간까지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그 장소에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의 속성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해서 마르틴 루터는 타락한 인간의 자화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homo incurvatus in se”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 있는 사람”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은 항상 자기 안으로 굽어 있는 상태로 사건을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가 되면 수용하고,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거나 유해하면 언제나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이제 본문 연구를 시작하십시다. 본론)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방문하려 복음을 전했던 역사적 배경을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복습해 보기로 합니다. 저는 본서의 4번째 강해를 통해 이 시대에 일어났던 몇 가지의 교회사적인 팁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제 1차 전도여행을 떠난 시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시기를 정확하게 산출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사도행전의 정황으로 볼 때 어림잡아 주후 44년 정도에 시작하며 끝난 시기를 넓게 잡아 48년 즈음으로 본다고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때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도우심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사역한 결과 많은 개종자들을 만들어 냈고 회심한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이 바로 갈라디아교회들이라고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워진 교회에 위기가 도래했는데 수없이 말씀드린 대로 거짓 교사들의 침투로 인한 배교였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다른 복음에 넘어간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을 보면서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이 단순히 갈라디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암묵적인 지원과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직시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할례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 논쟁으로 열린 예루살렘 총회가 주후 48년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이 시기는 교회사에 닥친 두 번째의 위기의 시기이기도 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주후 48년에 진행된 예루살렘 공회의 총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할례 논쟁은 이방교회였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승리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접근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다고 추론되는 시기를 대체적으로 주후 약 53-55년으로 산정합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쓸 때는 이미 할례논쟁이 이미 끝난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서 안에는 할례 논쟁에 대한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만큼 사단의 역사는 끈질겼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미 교회법으로는 일단락이 된 사건이지만 여전히 갈라디아 지역에 있던 일부 교회에서 배교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아픈 상태를 목도하고 있는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 시기였던 44-48년에 있었던 갈라디아 지역 전도 시기의 일들과 바울이 갈라디아라는 지역에 제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인 주후 50-53년경에 진행된 제 2차 전도여행 때의 그 싸늘했던 분위기를 본문에서 여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2-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이 회고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갈라디아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증언했던 초창기 즉 1차 전도여행 시기에 본인의 건강 상태가 최악이었다는 보고였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13절에서 ‘육체의 약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약함’의 번역인 헬라어 ‘아스데네이안’은 원래의 의미는 ‘질병’(illness)입니다. 영어성경 NASB(NEW AMERICA STANDARD BIBLE)에는 분명히 이렇게 번역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 때문에’ (because of a bodily illness) 그렇다면 우리가 추적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약함 혹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질병이 무엇이었느냐의 제 해답입니다. 바울의 질병이 어떤 것이었느냐를 그럴듯하게 접근해 주는 성경적인 내증을 하나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13:13절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이 구절은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의 동선 중에 일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의 하나가 밤빌리아입니다. 밤빌리아는 터키의 해안가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거주하던 바울이 당시 가장 많이 출몰하던 모기에 물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기는 유감스럽게도 말라리아모기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 얻은 말라리아 질병으로 심하게 고통을 받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바울이 적절하게 치료 받지 못하였고, 그 결과 바울은 전도 여행 내 이 질병의 후유증을 시달렸는데 그 가장 극한의 시기가 바로 갈라디아 지역을 전도하던 제 1차 전도여행시기였다는 보고입니다. 이 당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바울은 그 후유증이 가뜩이나 시원치 않은 시력을 공격했고 해서 그는 보는 것에 있어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해석은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가 시력에 치명타를 입자 그의 외면상의 몰골은 상당히 많이 일그러졌고, 해서 주후 200년 작품인 데클라 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외모가 몹시 부정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점도 그 이해의 폭을 넓혀줍니다. 여기까지는 그의 육체적인 질병 혹은 약함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는 도움을 줍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 보십시다. 사정이 이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이 바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본문이 제공해 줍니다. 다시 본문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외모 상 도무지 같이 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부담스러웠던 바울이 뭐라 천명합니까? 경천벽지 할 노릇입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 이게 도대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본받으라니요. 바울이 이렇게 말한 자신감은 그 구절에 있습니다. 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은 그들이 배교를 하기 전에 바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본문 14-15절은 압권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글 표현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보기에도 자신의 몰골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는 적지 않은 시험거리라는 것을 인정한 것을 보면 당시 바울의 외모와 육체적인 상태가 어떤 지를 가히 상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⓵ 업신여기지 않았다. ⓶ 버리지 않았다. ⓷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다. ⓸ 눈이라도 빼어 줄 기세였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최고의 대우였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는 VIP 대우였습니다. 여기까지는 해피 바이러스가 충만합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드린 또 다른 구절에서 우울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15절 전반절)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잊었습니까?’ 그렇다면 이 우울한 전망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6-20절을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이 본문의 배경은 제 1차 전도여행 때가 아닌 두 번째 방문 시기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배교하던 최 극점의 시기 말입니다. 그토록 바울을 사랑했던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이 배교 이후에 바울의 적대자로 돌변한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원수로 여겼고, 바울이 언성을 높일 정도로 등 뒤에 칼을 꽂는 바울의 대적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의 자화상을 바울은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의 원인을 율법주의자들의 이간질과 그 농간에 넘어간 자들의 그릇된 열심 때문이라고 바울이 17-18절에서 진단하고 있는데 이 내용에 대한 심도 있는 해석은 다음 주일에 여러분에게 제공하도록 약속하겠습니다. 오늘 주일 설교의 핵심적인 교훈은 조금 다른 측면이기에 저는 이 내용을 지금 나누려고 합니다. 앞서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전개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달리 언제든지 자기중심적인 축면에서 바라볼 때 본인에게 해가 되거나 불이익이 되는 상황이 되면 자기편이었던 상대에게 미련 없이 등 돌리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계산적인 존재이고 이해타산적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것을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자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반면교사를 삼고 역발상의 은혜를 나누어야 할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 그리스도인이라면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교훈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성경 기사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8:42-46절을 읽겠습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이 본문의 배경은 북 왕국 이스라엘입니다. 더불어 3년 6개월 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던 비극의 시대였습니다. 이유는 아합 정권의 불신앙 때문이라고 남 유다적인 역사가는 고발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절망의 시기였음은 분명합니다. 악한 왕 아합도 어쩔 수 없이 당시 최고의 선지자였던 엘리야에게 심정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마음을 안 엘리야는 갈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땅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얼굴을 그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7번까지 기도했다고. 역사가가의 증언에 의하면 같이 갈멜 산에 올라간 엘리야의 사환에게 엘리야는 한 번 기도가 끝날 때마다 비가 올 징조가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가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성경적인 해석을 하나 나누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다 그 의미가 있습니다. 3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6은 반대로 사탄적인 의미의 숫자입니다. 7은 우리에게는 행운의 숫자로 인식되지만 히브리 민족에게 7은 완전수입니다. 다시 말해 결론에 도달할 때 쓰는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여 비를 내리게 한 숫자는 일곱이라는 수가 아니라 비가 내릴 때까지의 숫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대단히 감동적인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엘리야도 중요하지만 엘리야의 몸종이자 사환이었던 무명의 인물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주군이었던 엘리야를 끝까지 믿어 준 동역자였으며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끝까지 믿는 사람이며,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교회 지체들과 함께 일 때문에 만났습니다. 교제를 하다가 정말로 감사한 나눔을 나누었습니다. 그날 만난 지체들은 저와 16년을 함께 한 지체들입니다. 그들과 교회 사역의 이런 저런 사역을 나누다가 공통분모로 나눈 것이 있습니다. 지난 16년이라는 세월동안에 얻어진 은혜는 담임목사가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는지 그리고 지금 무슨 목양의 기도 제목이 있는지 이미 알고 기도로 미리 동역한다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지난 16년 전부터 지금 16년까지 이어온 믿음과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인이 있습니다. 그는 한 교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기둥 같은 지체입니다. 섬기는 교회에 목사님이 은퇴를 하고 젊은 담임목사가 부임을 했습니다. 이후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교회가 난리가 났어요. 새로 온 목사님이 교회를 뒤집어 놓고 있어요. 너무 감사해요. 이러다가 우리 교회는 제일 큰 교회로 성장할 것 같아요. 이런 목사님을 보내준 하나님께 감사해요.” 이 고백을 한 후, 불과 약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흥분된 어조로 말하던 그는 그 교회를 떠나고 싶어 합니다. 이게 신앙입니까? 감정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눈이라도 빼내줄 것 같았던 자들이 바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직전 교회에 아무개가 10년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강덕 목사가 세인교회에서 3-5년을 시무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문제는 그 아무개는 지금 열손가락이 멀쩡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가볍지 말아야 합니다. 표리부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합니다. 끝까지 아름다워야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지체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끝까지 가야 가는 것이다.” 오늘 함께 갔다고 기고만장하지 맙시다. 내일 함께 갈 것이라고 떠버리지 마십시다. 끝까지 가야 가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묵묵히 주의 일을 감당하십시다. 우리들이 걸어야 하는 길을 단거리가 아닙니다. 장거리 중에 장거리입니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십리를 가는 자와 백 리를 가는 자는 신발 끈을 묶는 것부터가 다르다.” 기막힌 성찰이지 않습니까? 나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끝까지 함께 가기를 소망합니다. 끝까지 가야 함께 가는 것이기에.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걸어요 주의 인도하심 따라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요 주의 사랑 우리 안에 있네 우리 서로 섬기며 주의 사랑 나눌 때 모든 사람 다 알게 되리라 우리 주의 가족임을 우린 주의 한 가족 주 우릴 하나 되게 했네 주의 사랑 나누며 서로 섬길 때 주의 나라 이뤄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