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4:8-11
제목: 물러서면 되겠습니까?
서론)
히브리서 10:38절을 읽겠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제가 참 많이 인용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밝힙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좋아하는 또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15절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구절을 개역판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경이 요구하는 분명한 의지는 선명해 보입니다.
믿음의 싸움에 있어서 후퇴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래, 참 유감스러운 일이 교계에서 벌어지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몇 몇 교단에 대하여 저는 왜 저렇게 편협할 수밖에 없을까 할 정도로 너무나 천박한 폐쇄성을 나타내는 교단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그 중에 한 교단에서 이단성이 있는 몇 몇 기관과 단체들을 총회 차원에서 조사하라는 권고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그 단체들의 면면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야 할 단체들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병폐들을 좌시하지 않고 쓴 소리를 해 주고 있는 해서 그나마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은 소수의 개혁적 목소리를 내는 단체들과 목회자들입니다.
왜 이런 무리수를 그 교단에 두고 있는가 하면 본인들이 행하고 있는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불법에 대하여 쓴 소리를 던지는 그들이 눈에 가시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큰 교단에 반기를 들지 말라는 엄포를 낸 것입니다.
세습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말라는 폭력적 행위를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병폐에 대하여 가타부타 훈수 두지 말고 뒤로 물러서라는 압박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소회는 지금 교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몇 몇 역사의식이 있는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은 그렇다고 해서 그 압박에 굴복하여 자기들의 생각을 철회하거나 포기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한국교회를 위한 충성스러운 쓴 소리를 멈추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결코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해서 저 또한 그들을 응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 그리고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분명한 신학적 정론을 전제할 때 물러서는 것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일인데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는 목회적인 고집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끝까지 아닌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신 것은 끝까지 그런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물러서고 안 물러서고의 시소게임을 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분명한 신학적 소신은 저만 가지고 있었던 소신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확신에 차서 선언할 정도로 분명히 갖고 있었던 소신이었습니다.
본론)
바울은 지난 본문 텍스트에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구원의 실천과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구원의 완성을 통해 종의 자리에서 상속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 은혜를 받은 자인 우리들은 자녀로 급상승하는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짐으로 도저히 이전 같으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게 되었음을 적나라하게 선언했습니다.
이런 강력한 혁명적 선언을 한 바울은 이 은혜를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이 다시 종의 자리로 전락되기를 원했던 한심했던 신자들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중심 내용입니다.
본문 8-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이 구절은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배교자들이 복음을 알기 전의 상태와 알고 난 이후의 상태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본문 8절에 기록된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방 종교의 신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 지역에서 살던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우상에게 종노릇하는 신세였지만,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후에는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관심을 갖는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데도 정말로 유감스러운 행동을 갈라디아 지역 교회의 신자들이 자행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9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하십시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우리는 천박한 초등학문을 율법주의라고 이전 강해를 통해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만이 추구하는 율법적인 규례들을 지킬 때 구원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다는 편협한 종교 우월주의인 율법주의임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로의 회귀를 본문 10절에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이 구절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이 선포하신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수장절(초막절) 등등이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절기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장차 올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구원의 예표로 지키던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보혈의 피를 흘리실 것을 예표하는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사신 이후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이루시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더불어 초막절은 광야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 척박하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끝내는 그들이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절기이기에 이 절기는 다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절기로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이렇듯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는 오셔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이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 사수로 돌아선 것은 결코 예수의 사역을 인정하고 애굽에서의 삶이나 아니면 광야에서의 율법적안 삶으로 후퇴하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를 바 없었기에 바울은 탄식한 것입니다.
이 장탄식을 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결론적으로 유감을 표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지막 11절을 읽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장탄식은 정말로 가슴 아픈 소리였고 진정성이 있는 외침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방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큰 수고를 하였습니까?
딱히 갈라디아 지역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과정의 한 증언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0:17-21절을 나누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승리한 가운데 마친 바울이 이제는 순교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여행에 가기 위한 전단계인 예루살렘에 올라가 죄인의 신분이 되는 바로 그 직전 상황이 읽어드린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의 밀레도 만남 사건입니다.
이제는 다시는 못 볼 에베소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고별설교를 하던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세월의 격정을 떠올리며 반추합니다.
겸손하게 섬겼던 이방 사역, 눈물로 사역했던 과정, 수없이 닥쳐온 시험을 인내함으로 이겨냈던 추억들, 거리낌이 없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메시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대한 강력한 믿음을 증언했던 간증들을 솎아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이었을까요?
갈라디아지역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바울의 수고와 동일한 것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이 기록을 본문과 매치하여 적용한다면 어떤 설명이 가능합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수고하며 지킨 복음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행위들을 갈라디아 교회성도들이 자행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처럼 이렇게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섬겼건만 이제 너희들이 내 사역을 헛된 것을 만들고 있다는 장탄식이었습니다.
왜 바울의 사역이 헛된 것으로 돌아갈 위기에 봉착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발견하고 찾아야 할 교훈이자 레마입니다.
※ 할례가 ‘내 몫’이라는 감각적인 행위에 대하여 만족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겠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내용이기에 주목해서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을 떠나지 않고 본문 내의 정황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내가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내 몫은 필요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했습니다.
다만 구원의 사건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이 잘못 전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가 경험했고 확신했던 십자가 구원의 도를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에 있어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헌데 바로 이 대목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헛함을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도 매일반으로 갖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뭐가, 이렇게 쉽지!”
이런 감정적인 소회로 파급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혹시 가짜가 아닐까!”
구원의 조건이나 대가가 내 몫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허접해 보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이 허전해 하는 부분을 터치해 준 것입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 준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내 몫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갈라디아지방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들에게 ‘내 몫’의 부담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엄청난 사실에 이 정도의 부담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졌고, 또 그래야 ‘내 몫’의 짊어짐이 된다는 자기만족을 충족시켜준 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방과 후에 학교 정문에 영락없이 아주 거칠게 생긴 아저씨들이 진치고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야바위꾼들이었습니다.
탁자 위에 세 개의 컵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주사위를 하나 넣고 마구 헷갈리게 현란한 손동작으로 컵을 섞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사위가 들어 있는 컵에 돈을 거는 사람들은 건 돈의 세 배를 준다고 유혹했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 상당수 아이들이 방과 후에 그들에 거덜이 날 정도로 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돈이 없었기에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친구들 중에 많은 아이들이 피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을 해 보니 상당수의 친구들이 아주 쿨 하게 재수가 없는 것으로 마감하고 손을 깨끗이 털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했을까?
친구들 마음속에 돈 놓고 돈 먹기에 졌다는 것에 그리 많은 억울함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몫을 잘못 선택해서 당한 손해는 괜찮다는 쿨함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런 심리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너무 큰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 중에 율법으로 회귀한 자 중 상당수는 자기행위에 대한 확신을 십자가의 복음보다 더 신뢰하였기에 그들은 복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 교훈을 우리들에게 적용할 차례입니다.
※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일체의 것에 대하여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4장으로 여러 교우들을 초대합니다.
모세의 진두지휘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430년이라는 그 지긋지긋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해변 가에 장막을 쳤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곳으로 바로의 군사들이 때늦은 후회를 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포로로 잡기위해 진격해 온다는 비보를 들은 것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접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애굽에서 일으키셨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곧바로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터뜨리는 아쉬운 장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4:11-12절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무슨 말입니까?
본문과 관련하여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내 몫에 대하여 회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기꺼이 430년 동안 내 몫에 대하여 운명으로 믿고 감당해 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우리들을 부화뇌동하여 더 좋은 곳이 있으니 그곳을 가자고 꾀었고 우리는 그 꾀에 넘어가 여기까지 끌려왔고 그 결과가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자조 섞인 불평이었습니다.
이런 불평을 터뜨린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이 제시하신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4:13-14절을 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압도하는 구절이 보이십니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의 몫은 없다. 내가 행할 몫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결론이 무엇입니까?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면 그러니까 애굽으로 물러가려는 한심한 불신앙에 대하여 입 닥치라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 그곳에서 다시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은 비성서적인 일이었습니다.
비신학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일이라면 맞서 싸워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그 사안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리한 것이며 버거운 일이며 도무지 승산이 없는 일이라도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에서 목회자로서 당한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치욕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한 지역 공동체에 서 있는 교회 중에 제일 큰 교회 담임목사니까 그 자리를 보전하려면 위험한 설교를 그치라는 압박이었습니다.
가능하면 기득권을 위한 설교를 행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성도들이 듣기에 편안한 설교를 하라는 공격이었습니다.
주류들이 듣고 안심할 수 있는 정치적인 설교를 할 때만 그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무언의 폭력이었습니다.
목사의 양심으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목사는 설교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궁정의 녹을 먹고 편안하게 살던 길 예언자처럼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맞섰습니다.
후회가 없는가?
지금도 저는 그 때의 맞섬이 잘못된 것이라고 1도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신학자 한 명이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소개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마이클 호튼 교수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에서였습니다.
그는 책에서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하던 교회 안에 존재하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맹공을 가했습니다.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데 기독교의 본질처럼 둔갑되어 있는 실체를 그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⓵ 이신론의 용인입니다.
신학 용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심리적인 안정, 도덕적인 착함, 문화적, 정서적인 보편적 공감이 하나님의 뜻이며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기가 막힌 변질입니다.
⓶ 긍정의 힘이 복음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어불성설입니다.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으며 신학적이지도 않은 ‘번영의 복음’, ‘성공의 복음’을 현대인들에게 주입함으로서 아주 질 나쁜 이기적 신자들을 양산해 낸 장본인으로 오스틴 목사를 비판합니다.
⓷ 이머징 처치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게 살다가 온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위로의 자리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위해서는 교회 예배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신비주의적인 요소로 바꾸어 지친 영혼들을 달래야 한다는 사상이 바로 이머징 처치의 핵심입니다.
좋은 실례가 바로 TD 혹은 떼제 공동체와 같은 신비적인 운동이자 형상화 작업입니다.
저는 마이클 호튼 교수의 글들을 10여 년 전에 만났지만 그 이후에도 호튼의 이러한 정확한 신학적 전망들을 여타 다른 책들을 공부하였고 또 그 결과가 건강한 교회의 신학적 토대를 만드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결국 마이클 호튼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이미 공부했지만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십시다.
갈라디아서 1:6-8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에서 바울이 극히 강한 어조로 비판한 ‘다른 복음’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이클 호튼이 지적한 세 가지와도 같은 맥을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율법주의라고 했습니다.
호튼은 다른 복음을 십자가의 자리를 꿰차고 앉은 심리학, 신비주의, 성공의 복음 등등으로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왜 현대 교회의 화두가 되었을까요?
신자들에게 안락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평안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대단히 위험한 맹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안락함이 복음인가? 평안함이 복음인가? 에 대한 실제적인 답을 제시해야 하는데 교회가 이 점에 대하여 즉답을 회피합니다.
왜 회피합니까?
교회마저도 이 답을 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성서적 답을 제시하면 당장에 그 평안함과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는 이기성에 찌들려 있는 교회 성도들이 급감할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두릅니다.
우회적인 길을 택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공식으로 줄타기와 물 타기를 합니다.
이럴 때 제가 인용하기 좋아하는 글은 데이빗 플랫 목사의 벼락입니다.
“뒷짐을 지고 물러서서 그리스도와 가벼운 교제만을 나누며 기계적으로 교회를 드나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전할 뿐 아니라 세상의 미움도 사지 않는다. 설령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다고 해도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추구하면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 신화를 쫒는 기독교와 성도는 세상과 충돌할 일이 없다.”(데이빗 플랫, “래디컬”,p,223.)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예스하신 것이 올바른 신학입니다.
주님이 맞는다고 하신 것이 있으면 그것이 성서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만족을 신앙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인 공동체는 이것을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다시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1) 주께서 전진해 온다.
2) 저 성벽을 향해
3)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세 곡을 같이 연달아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