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3:23-25
제목: 구원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의 기로에서
서론)
진해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특새를 통해 갈라디아서를 일주일 동안 해석하면서 은혜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사역했던 원고를 제 설교 파일에 보관하여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3년에 진행했던 갈라디아서 강해 사역을 일주일에 끝낸 것은 저에게는 나름 자부심을 갖게 했던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2019년이니까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러분과 오늘 나누는 갈라디아서 강해가 20번째 순서인데 16년이 지난 지금 제가 갈라디아서 강해를 위해 본문을 해석하고 거기에 맞는 원고를 작성한 글과 진해교회에서 2003년에 진행했던 원고를 어쩔 수 없이 비교할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느끼는 소회가 이런 것입니다.
“진해 교회 신자들은 성자였다.”
16년 전 원고를 들추어보면 얼마나 당시의 성서 해석과 이해가 허접했고, 깊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설교를 들어주면서 아멘해 준 진해 교회의 지체들을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성품을 가진 성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16년 전, 이강덕 목사의 갈라디아서 강해와 지금의 강해가 왜 질적인 수준 차이가 날까를 묻는다면 그 답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⓵ 당시, 저는 40대 초반이었습니다. 반면, 지금은 50대 후반입니다. 그러기에 목회의 내공과 사역의 깊이가 같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목화자로서의 내공을 갖고 있습니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⓶ 16년 전보다 지금이 더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부는 지정의의 모든 공부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의 제가 조금 더 성장한 모습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세인교회 지체들과 나눌 수 있는 이유는 종이 그때보다는 더 많이 공부한 결과물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16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성숙과 성장입니까? 아니면 정체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후퇴이며 침체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에베소 교회의 지체들에게 권고했습니다.
에베소서 4:13-15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 교우들 거의 대부분이 읽은 카일 아이들먼의 ‘NOT A FAN’에 기록된 에필로그의 글 때문에 우리는 한 동안 은혜를 나누었던 글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은 본인이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윌리엄 보든을 소개합니다.
억만장자였고, 명문대 출신의 장래가 촉망되는 수재였고, 수십억 달러의 가치가 나가는 낙농 회사 상속자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 미련 없이 이슬람교도들이 있는 위험한 땅으로 가서 그곳을 복음화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25세의 아까운 나이로 척수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나 그토록 본인이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원했던 이슬람의 땅인 카이로에 묻히게 된 하나님의 사람 말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성경책 속에서 발견된 세 개의 문장은 지금도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를 물으며 영적으로 흥분하게 합니다.
“NO RESERVES/NO REGRESS/NO RETREATS” (pp,288-291)
“남김없이, 후회 없이, 후퇴 없이”
모두가 은혜로운 흔적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우리 교우들과 세 번째의 문장을 질문하고자 합니다.
세인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후퇴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장하여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본론)
오늘 본문을 저는 23-25절까지 만으로 한정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도 나누어야 할 은혜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성숙해져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흔쾌히 응답하기까지,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세심하게 둘려 쌓여 보호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은 여러분이 잘 아는 그리스도의 가정교사와 같습니다. 아이들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거나 산만해지지 않도록 지켜 주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도와주는 가정교사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직접 사귀게 되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를 ‘가정교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개역판에서는 ‘몽학 선생’이라고 번역했고, 이 단어가 한자라 조금 어려워 쉬운 단어로 개역개정판이 번역했는데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초등선생’입니다.
모두가 다 의미가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만 ‘파이다고고스’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가 ‘소년들을 보호하는 보호자’ 혹은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전제한다면 ‘아이들을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노예’를 의미했던 것을 보면 제게는 ‘초등교사’가 적절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등교사의 역할, 가정교사의 역할, 몽학선생의 역할을 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바울이 본문에서 비유로 말합니까?
율법입니다.
저는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지난 강해들을 통해 계속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존재해야 하며 지난주에는 심지어 믿음과 병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선포했습니다.
다시 한 번 복습하지만 율법은 믿음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들이 범법하는 죄인임을 인식하여 도무지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고 율법은 십자가로 우리들을 초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율법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막 살지 않게 된다는 것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의 적용은 대단히 용이해지고 쉬워집니다.
어떻게 적용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율법은 몽학선생이고, 가정교사이고, 초등선생이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운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치원생들을 도로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선생님의 지도하에서 일제히 하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손들고 횡단보도 건너기였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뻐 보이든지, 이제 저도 할아버지 모드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저 같은 사람들의 일련의 무리들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손을 들고 건넌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어떤 느낌이 들까요?
혹시 저 할아버지들 모두가 치매? 그러지 않겠습니까?
초등학교 교사는 초등학생들에게 필요하지 장년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가정교사를 들인다면 분명히 내 자녀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부족한 지식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고용하지 완벽한 아이에게 돈 들여 가정교사를 들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스카이 캐슬러 같은 괴물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우리들이 율법에 매인 것은 믿음이 오기 전이었다고.(23절)
더불어 25절에서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바울은 적시했습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언어적인 기술이 보이십니까?
믿음이 오기 전, 초등교사에게 인도를 받았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 결코 초등교사의 지도 아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전제한 바울의 발언입니까?
성장을 전제한 발언입니다.
성숙을 전제한 발업니다.
키가 자랐기 때문도 아니요, 몸무게 많이 나가는 성장을 경험했기 때문도 아니라 바울은 믿음 이전과 믿음 이후의 분명한 구분으로 초등선생의 지도 역할을 구분하고 있음에 오늘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오시기 이전까지의 신앙인들의 삶의 바로미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이제는 예수께서 우리들에 보여주신 복음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 삶의 바로미터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시대인 지금도 율법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는 복음의 능력을 무기삼아 율법을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영적 교훈을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의 레마로 받겠습니다.
※ ‘구원 그 이전의 삶’에서 ‘구원 그 이후의 삶’으로 성장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율법은 구원 그 이전의 삶을 지배했던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초등선생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의 인솔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인솔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교훈을 나누면서 상당히 아이러니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정답이라고 믿기에 담대히 전하고자 합니다.
율법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초등선생의 테두리 아래에서 벗어나는 삶은 율법을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더 율법에 민감한 긴장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히틀러 치세의 나치즘에 저항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린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나를 따르라’라는 걸작에서 치를 떨며 경계했던 것을 소개하는데 소위 말하는 ‘값싼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값비싼 은혜인데 현대 교회는 이 은혜를 가장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죄를 범했다고 본회퍼는 지적했습니다.
해서 복을 남발하고, 은혜를 떨이로 팔고, 가장 거룩하고 엄숙해야 할 사죄의 은총이 돈 몇 푼에 팔리는 기막힌 재앙을 현대교회가 자행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소중함을 잃었다고 호되게 나무랍니다.
“믿음의 결핍에 대한 불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불순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목회자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은 값싼 은혜의 위로와 너무 잘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본회퍼, “나를 따르라”,p,67)
우리들이 은혜로 값비싼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율법이 조명하는 성숙한 삶을 살아내도록 조금은 과격하고 억센 표현 같지만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어떻게?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내야 합니다.
이제 설교의 서두로 돌아가 우리 모두에게 자문하십시다.
여러분은 16년 전보다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예배를 드린 이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16년 전보다 더 많은 예배를 드렸다면 그만큼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조명하신 성령의 검인 말씀을 배운 것입니다.
성령의 검인 말씀을 그만큼 더 많이 받았다면 여러분은 그 만큼 더 성령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예배의 감동에 젖어보고, 말씀의 능력을 받았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한 역동하시는 은혜를 받았다면 당연히 그만큼 더 성장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을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왜요?
이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한 저와 여러분은 거기에 걸 맞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살아냈습니까?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교우들과 함께 성경을 통독하면서 읽었던 역대하 13장에서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감동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남 유다의 초대 왕이었던 르흐보암은 백번을 양보해서 역사의 평가로 보면 그냥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았던 그런저런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아비야가 유다의 제 2대 왕으로 등극한 뒤, 판세는 전혀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아버지 르호보암이 뜨뜨미지근 한 상태로 걸어갔던 유다의 영적 상태를 정비하고 나라를 곧추 세우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바로 그 때 군사력이나 경제력 그리고 인구 밀도로 비추어 볼 때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800,00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합니다.
당시 아비야에게는 그 군사력의 반 밖에 되지 않는 400,000만 명이 고작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전쟁은 게임이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헌데 아비야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전쟁이 막 시작되기 직전 양국의 군사들이 서로 마주보며 일촉즉발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바로 장소인 스마라임 산 위에 올라가 아비야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과 그의 부하들을 향하여 소리치는 메시지를 읽다가 뭔가 가슴을 뛰게 하는 영적 흥분을 자아내게 했던 기억이 생생해 교우들에게 소개한 뒤에 설교를 마감하겠습니다.
조금 긴 글이지만 집중해서 경청해 주기를 바랍니다.
역대하 13:7-12절입니다.
“난봉꾼과 잡배가 모여 따르므로 스스로 강하게 되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대적하였으나 그 때에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그들의 입을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들이 수종들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잔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
정말로 소름끼치는 감동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는 나의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계신다고 선언할 성숙함이 있으십니까?
나에게는 나를 위해 중보하고 있는 분명한 목회자가 있기에 두렵지 않다고 확신하며 믿음으로 세상에 나아가 선포할 믿음의 성숙함이 여러분에게 있으십니까?
나는 매일 저녁에 불을 켜서 주님께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의 성숙함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
제가 그날 읽었던 말씀 중에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역대하 13:12절 후반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아, 하나님께 대적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기실 것이다. 이 목사야, 주눅 들지 말고 외쳐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싸울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기게 할 것이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노명우 박사가 ‘세상 물정의 사회학’에서 이런 글을 기록했습니다.
“분유로 시작한 인생, 상조회사의 고객으로 끝맺는다.”(p,251)
글을 읽다가 너무 단순한 문장인데도 왠지 마음이 아스라해졌습니다.
이 문장에서 자유로운 인생이 있습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인데 무슨 대단한 벼슬을 하려고 하고, 무슨 엄청난 재력을 축적하려고 아귀다툼으로 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을 내며 삽니까?
저는 분유로 시작하고 상조회사 고객으로 끝을 맺는 평범한 우리 인간의 자화상 속에,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만큼 위대한 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태어나고 죽어가는 내 삶의 현장에 개입하셔서 나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셨다면 우리는 이제 거기에 맞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더 강력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밝힌 대로 외부 주차장에 파킹하는 인생을 살아도 달라스 윌라드 목사의 말대로 값비싼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더 노력하고 분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달라스 윌라드,“잊혀진 제자도”,pp,121-122)
이 촌철살인의 메시지에 아멘하고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살아내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땅으로 한걸음씩 나아갈 때에
수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 나를 두렵게 하지만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큰소리 외치며 나아가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 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 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