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월요일) 묵상 떼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78:17-20, 52-55, 출애굽기 33:7-23, 사도행전 7:30-34 꽃물 (말씀 새기기) 출애굽기 33:3,15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3절)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5절) 마중물 (말씀 묵상)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모세가 하나님께 고한 15절을 읽다가 이순신 장군의 어록이 생각났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나안에 올라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은 그 땅에 먼저 올라가 좌정하셔서 그 땅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의지 표명이리라! 그런 하나님이 나는 너희와 함께 가나안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말 그대로 폭탄선언이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 가나안 행, 아무런 의미 없다. 이것을 안 모세가 물러서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시지 않으면 우리도 그곳에 보내지 마십시오. 강짜도 이런 강짜가 없다. 하나님이 가나안행을 거절하신 이유는 시내산 밑에서 자행한 금송아지 난장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우리들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가벼운 애송이인 ‘에겔’로 조작했고, 그들은 난장판에서 ‘짜헤크’ 즉 성적인 광란의 자리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분노할만한 충분한 이유에 기인했기에 동행을 거부하신 것이다. 이 정도면 유구무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가나안 입성은 허울 좋은 껍데기임을 알았던 모세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떼를 쓴다. 왜 그런지 나는 모세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목회를 하면서 아주 가끔 하나님께 떼를 쓰는 때가 있다. 아니, 조금 더 리얼하게 표현하자면 어리광을 부릴 때가 있다. 목회가 그렇다. 분명히 잘못한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기회를 다시 얻기 위한 떼씀이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에게 져주신다. 그렇다. 나도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기에 악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용하고 싶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떼를 쓴다. 거의 협박 수준이다. “하나님, 친히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도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헌데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의 이런 생떼에 몰라라 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냥 감사요 눈물이다. 두레박 (질문) 나에게도 모세의 용기가 있나? 손 우물 (한 줄 기도) 제가 떼를 쓴다고 해서 외면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세인 교회 지체들을 위해 필요한 떼씀에 응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힘 있게 사역할 수 있습니다. 나비물 (말씀의 실천) 기도는 가끔 생떼를 쓰는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는 삶을 이번 주간도 살아야 하겠다.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어제 주일에 선포한 메시지를 종도, 지체들도 꼭 붙들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