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토요일) 묵상 내 옆에 누가 있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2편, 열왕기상 21:20-29, 마가복음 9:9-13 꽃물 (말씀 새기기) 열왕기상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오래 전, 목원대학교 이희학 교수의 책을 보다가 신선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이 교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탄생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이해했다는 점이 내게는 신선했다. “북쪽 지파들의 항거는 바로 세습에 기초한 제도적 왕권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국의 요소를 소유하지 못한 르호보암 왕국을 강하게 부정한 사건이었다. 북 왕국의 건설은 제도적 왕권과 카리스마적인 왕국 사이에 나타난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였다.” 이 교수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적어도 오므리 왕조의 탄생 이전 여로보암 1세의 북쪽 왕국 탄생의 의미를 신명기사가들의 남 유다 편향적인 해석에 좌우되지 않고 나름의 균형적인 주석적 성찰을 하기 위해 노력한 이 교수의 노력에 나름 지지하며 고마워했던 기억이 오롯하다. 오므리 왕조 말년의 주인공인 아합도 일반적으로 최악의 우상숭배자. 사악함의 극을 달렸던 왕으로 매도하기에는 조금은 유감스럽다. 오늘 성서일과만 보더라도 그렇다. 엘리야와 같은 궁정 예언자가 아닌 자유로운 예언자가 아합의 죄를 질타하는 현장에서 그는 예언자의 말을 듣는 귀를 갖고 있었다. 듣는 것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분명한 자였다. 주변적인 환경(이세벨과 같은)에 휘둘림으로 끝내는 파멸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그는 다바르를 경청하던 자였다. 경청과 더불어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통회했던 자다. 그가 실패했던 것은 좋지 않은 자들에게 영적인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합 스스로가 신앙적 이니셔티브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오므리 왕조라는 역사의 기록을 다시 기록할 수도 있었는데 매우 애석하다. 영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과 연대하고 교제해야 할 이유를 아합에게서 발견한다. 두레박 (질문) 내 주변에 누가 있지? 나를 견인할 사람? 추락시킬 사람?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나를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인도해 줄 동역자를 보내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친구를 잘 사귀자. 좋은 사람을 찾아내는 민감함도 구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매일이 긴장입니다. 공동체 안에 수술을 해야 하는 지체들이 늘고 있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수술 스케줄이 잘 정해지게 해 주시고, 완벽한 수술과정이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