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수요일) 묵상 1,000% 아멘 했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9:105-112 잠언 6:6-23 요한복음 8:12-30 꽃물 (말씀 새기기) 시편 119:1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마중물 (말씀 묵상)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목욕탕에 가서 유진 피터슨의 유고집인 『잘 산다는 것』을 읽었다. 책을 펼쳤는데 첫 문장에 눈에 들어왔다. “말씀이 첫 번째였습니다. 말씀이 다른 것보다 앞섰습니다. 우리가 모태에서 잉태되고 형태를 갖추기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어떤 일도 벌어지기 전에 말씀이 계셨습니다.”(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복 있는 사람, 19.) 이래서 유진 유진하는구나 생각했다. 오늘 페북에서 한희철 목사가 올린 단상 하나를 보았다. “서경대 아래쪽 후미진 골목길을 지날 때였다. 인적이 뜸한 좁은 길이었는데, 뭔가 바닥에 적힌 글씨가 눈에 띄었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바다의 시작’, 글씨가 적힌 곳은 배수로 덮개 앞이었다. 한 배수구를 ‘바다의 시작’이라 적은 것이었다.” 한 목사의 소회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찾아서 노벨평화상이라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근래 ‘시원(始原)이라는 단어에 필이 꽂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원이 본질이기에 말이다. SNS에 올린 글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기 시작한 모 유명 목사가 명성교회 하기 수련회에서 행했던 설교 영상이 퍼 날려지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나 역시 짤로 그의 설교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후회했다. 보지 말 걸(ㅠㅠ) 한 동안 언급한 목사를 좋아했던 교회 지체가 작년 여름, 우연히 사적인 만남에서 대단히 실망스러운 소회를 피력했던 것이 바로 이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네! 하는 기억이 떠올랐다. 목회를 하면서 강단에서 사력을 다해 지키려고 하는 것이 있다. 딴소리 안 하기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힐문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 원고에 기록한 내용 이외에 딴소리하지 않기는 미션인데 목사를 자꾸만 유혹하는 미끼 상품이 딴소리다. 내가 지켜야 하고, 내가 사수해야 하며, 내가 천착해야 하는 것은 말씀 즉 하나님이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다바르’ 즉 시원이었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오셨던 방법 즉 육화된 말씀이 곧 시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성서일과에서 읽은 시인의 고백이 절절하게 내 심장을 타격한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다바르’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고 달려왔다.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달려가려 한다. 유진 피터슨이 계속 말한 글을 밑줄 긋고 페이지 여백에 이렇게 썼다. 1,000% 아멘. “말씀이 옆으로 밀려나 행동과 프로그램의 종이 되었다면, 우리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속의 광대한 샘과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의 책, 같은 페이지에서) 손 우물 (한 줄 기도)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로 살아온 지 31년이 지났는데 단 한 번도 말씀보다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그렇게 살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다바르’가 조금도 변질되지 않고 삶으로 실천되게 하옵소서.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튀르키에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아픔이 끝나게 해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