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금요일) 묵상 하나님이 손절하지 않도록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2:1-9, 이사야 29:1-12, 야고보서 3:13-18 꽃물 (말씀 새기기) 이사야 29:10-12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제 1 이사야의 경고다. 내가 공부한 제 1 이사야의 텍스트는 1-39장이다. 유다의 멸망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아픔을 알고 있었던 제 1 이사야였기에 오늘 성서일과를 통해 선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진한 경종으로 다가온다. 유다에게 임한 참극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의 공격이었다. 이로 인해 주의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뾰족하게 사라졌던 비극이었다. 엘리 시대의 영적 기상도와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 3:1)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종들에게 주어졌던 계시들이 봉해진 시대의 비극이야말로 유다의 참극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재앙이다. 목사로 30년을 훌쩍 넘긴 삶을 살았다. 이 말의 의미는 상업적이지 않다. 30년간,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 살았다는 말이기에 그렇다. 뒤돌아본다. 30년이라는 지난 세월동안 내가 강단에서 전한 말씀들이 얼마나 될까? 계산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선포한 말씀의 질량을 계수하기에 앞서 어떻게 이게 가능했단 말이지? 이것이다. 묻고 싶다. 다시 곱씹으며 상업적이고 상투적인 식상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새기고 싶다. 이것을 전제하며 행한 답변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다. 이것이 없이 어떻게 30년을 말씀 전하는 자로 살 수 있었겠는가? 교재가 있으니까, 설교 공장에서 물량공세를 하며 줄 테니 입금만 하면 된다고 유혹하는 넘쳐나는 자료가 있으니까, 기라성과 같은 설교자들이 기가 막히게 만들어 올린 설교 원고들이 인터넷 상 지천에 깔려 있으니까, 클릭 한 번 하면 완성도 있는 설교 원고가 프린팅 되어 내 앞에 도착하니까 가능했는데 왜 엄살을 부리냐고 힐문한다면 힐문하라지 뭐! 라고 버팅기고 싶다. 나는 그것들 때문에 30년을 버텼다고 1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그런 류는 솔직히 관심 없다. 재 강조하지만 내 사역의 절정은 하나님과의 교제다. 나이가 육십을 훨씬 넘기고 보니 이 양심고백은 더 절절하고 진정성이 있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교제를 이어 왔기에 설교 강단에서 버틸 수 있었다. 제 1 이사야가 오늘 성서일과에서 이렇게 성토한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10-12) 재앙이지 않나? 이런 재앙이 또 어디에 있나? 그렇다. 제 1 이사야 시대에 아리엘(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은 하나님이 행하신 손절하심이었다. 오늘, 제 1 이사야가 토로한 일성이 무겁게 다가온 이유다.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무섭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내게 손절하는 일이 없도록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 사역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최대치 귀를 열자. 더불어 마음판도 열어 새기자. 그리고 이후 보폭을 성큼 딛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수술한 지체가 있습니다. 후유증은 극소화되게 하시고, 빠른 속도로 회복되게 해 주십시오. 언제나 교회의 중심은 아픈 자들입니다. 주님, 현장을 찾아가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