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작년, 저는 엘리위젤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한 해였습니다. 책을 출간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동안 적극적으로 만나려고 했던 지식인이었기에 더 더욱 저에게는 간접적이기는 했지만 그와의 기쁜 만남을 이룬 셈입니다. ‘팔티엘의 비망록’을 위시해서 ‘나이트’, ‘샴고로드의 재판’, ‘이방인은 없다.’ 등등은 적어도 오늘을 사는 나에게 인간으로서의 상식적 삶이 무엇인가? 의 질문을 비롯하여 진정한 신앙인의 정체성까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 준 선생님이 되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위젤의 보고 중에서 특히 ‘홀로코스트’를 통해 가슴 깊이 새겨본 장면이 저에게는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부나 수용소가 연합국에 의해 폭격을 당할 때, 배가 고파 음식물을 훔친 세 명의 수감자들이 발각되어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0,000명 정도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3명이 즉결심판의 모양새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어린 아이 피펠입니다. 교수형이 처해지자마자 어른 두 명은 절명하지만 어린 피펠은 몸무게가 가벼워 오랜 시간동안 숨이 끊어지지 않는 고통을 경험 한 뒤에야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엘리위젤을 비롯한 수감자들이 봅니다. 그렇게 그 비극의 현장은 막을 내립니다. 이 일 후에, 엘리위젤이 이 작품에서 가슴 먹먹함으로 전하고 있는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카디쉬’ 기도문을 제사장이 낭독할 때의 일입니다. 제사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할지어다.” 이 기도 노래에 엘리위젤은 강력한 반발심을 표합니다. 무기력한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직 피지도 않은 어린 피펠이 교수형을 당할 때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리고 엘리위젤은 이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엘리위젤은 이렇게 속으로 소리칩니다. “하나님, 보고만 계시렵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는 지금 암 투병 중인 지체들을 위해 중보하고 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우들의 예후는 별로 좋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저 역시 하나님께 항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엘리위젤의 독백입니다. “하나님, 보고만 계시렵니까?” 가끔 목회가 눈에 보이는 신바람이 나야 목사도 힘이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목회의 여정 중에 제가 느낀 것은 하나님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시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해서 목회 현장에서 30년을 뛰었지만 어느 때에는 목사인 저도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직 그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왜? 엘리위젤은 피펠이 교수형에 달려 숨을 거둘 때 누군가의 음성을 듣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엘리위젤도 똑같은 심정임을 표할 때 그는 또 다른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단다.”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환우들이 아파하는 그 아픔을 하나님도 같이 느끼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라고, 비겁한 자들의 궁색한 변명이라고 공격할 것이 분명하지만 저는 그래도 이것에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같이 당하고 있다는 것을.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씨가 부른 노래 중에 ‘못 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랫말을 가진 곡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럴까? 제가 이 노래의 가사에 천착하는 것은 가수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그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을 누군가가 했다면 그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이 확신도 큰 감동이지만 더 큰 감동은 그 아픈 사랑이 지금도 현재진행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절망하고 있는 자들의 곁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고 같이 아파하시며 아픈 사랑을 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아픈 사랑을 지금도 아픔을 당하는 자의 가장 지근거리에서 하고 계십니다. 이 아픈 사랑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알기에 저는 오늘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할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