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22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4:1-7 제목: 아빠 아버지 서론) 요 근래 아들하고 아주 심각하게 결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혼기가 찬 나이이고 더군다나 목회든 공부든 혼자가 아닌 둘이 하는 것이 낫다고 느꼈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혼이야기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더군다나 딸을 가진 친구 목사들이 근래 여기저기에서 아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서 조금은 마음이 급해진 것도 아들과 함께 결혼 이야기를 나눈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부모의 마음으로는 제가 맨 땅에 헤딩을 한 케이스이기에 적어도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있는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개척하고 닦아나갔던 수월치 않았던 과정을 건너뛰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아들의 배우자가 목회를 하는 가정의 처자였으면 하는 마음이 큰 게 사실입니다. 해서 아들에게 관심을 보인 선후배 동기 목회자의 요청이 있으면 저 역시 호감을 갖고 보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 소회에 대한 대화를 나누려고 아들과 시간을 함께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아들은 저에게 이런 편치 않은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평생 동안 아버지가 목사라는 것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신학을 선택하여 아버지의 모교에 들어갔더니 이번에는 학부는 물론 대학원 과정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를 다녔고 심지어 대학원 지도 교수는 아버지와 절친한 동기 교수님의 지도라는 이름 하에서 또 다른 엄초시하를 겪으며 무거운 중압감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제 세 번째로, 제 아내가 될 사람마저도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낙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저는 결혼 이후 또 다른 압박감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세 번에 걸친 중압감으로 살아가는 것이 저에게는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시니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들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본인의 감회였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아들을 놓아주어야 하는데 그런데도 참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앞에서 말한 아들의 고충을 듣고 이해하는 것으로 치부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들이 맨 마지막에 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에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던 시아버지와 말이 통하는 며느리, 삼대가 믿는 집의 처자, 아들과 함께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은 버렸습니다. 다만 장인, 장모가 목회자였으면 좋겠다는 것은 아직도 붙들고 있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런 욕심을 부리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아들이 제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담임목사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것 같기에 노파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들이 제 유일한 상속자라는 말은 경제적인 부분을 염두 해 둔 발언이 아닙니다. 아들은 이 땅에 존재하는 저의 정신을 나누고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이런 관계입니다. 저는 오늘 공교롭게 어버이주일 아침에 부자지간의 관계로 비유를 말하고 있는 본문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교우들과 나누게 되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준비 중에 결코 가볍지 않은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오늘 주어진 본문은 이전 설교를 통해 살폈던 3:26-29절의 메시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3:26절에서 천명한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이 듣기에 상당히 불편한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29절의 선언이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테두리 안에서 볼 때 돌멩이에 맞을 만한 폭탄선언을 바울은 가차 없이 터트린 것입니다. 이런 과격한 발언을 행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의 거침없는 발언을 이어갑니다. 1-3절을 먼저 해석하겠습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별로 바람직한 비유는 아니지만 본문 이해를 위해서 이런 예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거의 식물인간과 다름이 없이 기계로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 삼성 회장의 아들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입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다음과 같은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경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일본 게이오기주크 대학 MBA와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MBA DIP을 갖고 있는 이력입니다. 재벌 2세답게 화려한 이력을 소유했습니다. 헌데 오늘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부회장이 지금 삼성이라는 기업의 총수를 이어받은 시기입니다. 자료를 보니 2012년입니다. 그는 1968년생 이니까 금년 한국 나이로 52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굴지의 기업 후계자로 일선에 선 나이는 45세부터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별로 달갑지도 않는 삼성 그룹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습니까? 이 부회장이 아버지의 업을 이어 두각을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임을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냥 평범한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전적으로 재벌 2세로 기업을 인수받을 때까지는 삼성맨으로 출발했습니다. 똑같은 사원으로 출발했다는 것은 동등한 출발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똑같이 출발을 했지만 다른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으로 본문을 이해하면 수월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논거를 시작합니다. “어떤 상속자가 있었다. 아마도 그는 대단한 유산을 물려받을 상속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가 어렸을 때 비상속자와 별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하는 후견인과 청지기의 말을 들어야 했고 또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상속자나 종이나 매일반이었다.” 이게 1-3절의 메시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언한 상속자와 종의 비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풀면 이렇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모두가 후견인이자 청지기의 역할을 하는 율법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이 율법은 세상의 초등학문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당연히 의무 교육을 받는 것처럼 거기에 매여야 했다. 이 점에서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이나 비 혈통적인 이방인이나 다 동일하게 율법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개벽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4-7절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바울의 이 발언에는 대단히 중요한 그의 신학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⓵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4절) ⓶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6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초등학문인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을 풀어주시고 이제는 종인 아닌 상속자가 되도록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의 구속사의 플랜 A를 가동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동등하신 격을 갖고 계신 성자와 성령의 파송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파송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라는 두 속성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사건이었고, 성령 하나님의 파송은 종에서 상속자로 신분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주체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목할 문구가 있습니다. 4절과 6절에 공히 등장하는 단어 ‘헥사페스테이렌’ 즉 ‘보내사’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시제가 같은 과거의 시제라는 점입니다. 영어 번역에는 4절의 ‘보내사’는 과거로(SENT FORTH) 6절의 ‘보내사’ 현재완료로(HAS SENT)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 성경은 시제가 같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자의 파송 시기, 성령의 파송 시기가 다르지 않고 같다는 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래서 이렇게 이 구절을 아주 의미 있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을 둘 다 보내셨다.”(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BST 강해”,P,132.) 왜 이 부분을 제가 중요하게 터치하고 있습니까? 이런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선제적인 교훈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오셨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보혜사 성령이 후에 오셨다고. 그것은 예수께서 영적 질서에 대한 교통정리 차원에서의 말씀입니다.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에 의해 동시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성자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에 얽매여 있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한 주목할 것은 성령님이 같이 오셔서 구원을 받은 저와 여러분에게 신분 변화를 확실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떤 신분 변화입니까? 본문 6-7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렇습니다. 종에서 상속자로 신분을 변화시켜주었습니다. 비상속자에서 상속자인 아들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율법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엘로힘 혹은 야웨로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포로 이후에 그들의 죄로 인해 감히 너무나 존귀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 부를 수 있는 단어로 ‘주’라는 의미의 ‘아도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결코 죄인 된 입장에서 하나님을 막 부를 수 없다고 믿은 최소한의 종교적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웬 파격이란 말입니까?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아빠’는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람어입니다. 파격이었습니다. 혁명이었습니다.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유업을 받을 상속자가 된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뿐만이 아니라 로마서 8:15-16절에서 바울은 자신 있게 이렇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저는 바울의 이 말씀을 바울이라는 믿음의 선배가 말했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수용합니다. 그런데 제가 더 주목하는 것은 바울의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선언입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을 도구로 심아 이렇게 천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확신을 누가 줍니까? 하나님이 같이 보내신 성령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목할 것은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흔들리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 주일설교를 통해 오늘의 언어로 주시는 교훈을 받아야 할 차례입니다. ※ 자녀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번 설교를 통해 잠시 언급한 대로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군복을 입으면 군인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비군복을 입으면 어딘가 모르게 군기가 빠져 보이게 행동합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면 순결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신부처럼 행동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드레스를 입고 일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녀들에게는 드레스는 거추장스러운 옷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내가 가끔 저에게 서울이나 외지로 외출을 할 때 목회자 와이셔츠를 입지 말고 일반 와이셔츠를 입으라고 종용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아니면 흥정을 할 때 제가 옆에 목사 와이셔츠를 입고 있으면 할 말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목사답게 사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도 매일반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 말고 진짜 신실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양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3-14절을 읽어드립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방탕아이자 엉망진창의 인생을 살았던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바꾸어준 주님의 말씀입니다. 헌데 이 말씀이 어찌 어거스틴에게만 주어진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기에 근신하고 조신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밤 같이 사는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아들과 대화를 하는 어간, 아들이 살아오면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옷깃을 여미며 때때마다 생각하고 살았던 내용이 이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평생 동안 아버지가 목사라는 것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무거웠을까를 생각하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에비로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아들아, 목사 아들답게 살려고 노력하느라 힘들고 수고했겠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아들은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니?” 달라스 윌라드 목사는 ‘잊혀진 제자도’에서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촌철살인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내적 존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인간이 이루는 일이 아니다. 결국 그것은 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영성개발은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므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p,154) 이 교재를 가지고 ‘구원 그 이후 반’이 사역하고 있기에 그날 이렇게 거침없이 전했습니다. “은혜, 은혜만 외치지 말라! 은혜를 받은 자라면 은혜 받은 자답게 살라”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한 번 더 들어가면 그 사람은 더 그 은혜 받은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에 ‘답게’ 사는 것은 말장난이나 언어의 유희가 아닙니다. ‘답게’ 사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적어도 우리 세인 지체들은 당신의 부모님들의 얼굴을 후끈거리게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위해 그 연약한 계란이라는 무기로 당신들을 대적하는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 평생을 사셨다는 것을 명심하게 여러분의 부모님들의 자녀답게 살기를 권면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더 중요한 교훈을 하나 더 던집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군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오늘도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계속해서 응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아들답게 살기를 독려하십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여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⓵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행하면서 사십시다. ⓶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제거하며 사십시다. 이것이 바로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아름다운 영광의 주를 보라 보좌에 앉으신 그 어린 양 예수 다 무릎 꿇고서 주 경배하리라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주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영원 영원토록 받아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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