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 부활주일 설교 제목 : 스티그마 (7) 본문 : 요한복음 20:11-18 서론) 우리는 지난 6일 동안 ‘스티그마’ 라는 제목을 갖고 저녁 집회에 참석하여 고난주간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대단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실은 6번의 집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나누며 다시 한 번 신앙의 재점검을 하고 마무리를 하려고 했는데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자꾸만 한 번 더 스티그마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야 하겠다는 영적 감동이 밀려와서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새길 예수 그리스도의 스티그마의 절정은 아마도 부활 신앙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저를 독려했기 때문입니다. 정녕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 현수막 거치대에 부활주일 플래카드를 만들면서 이러 문구를 삽입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심장 소리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 없다는 매우 강력한 담임목회자의 목회철학이 담겨 있는 메시지를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성도가 가져야 할 스티그마 신앙의 클라이맥스를 저는 부활신앙이라고 먼저 정의하면서 설교를 이어 가겠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내일이라는 개념이 하루살이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미에게는 내년 여름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매미는 내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와 매미의 일례는 우리들이 충분히 공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학적인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실례는 과학적인 수긍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1961년 세계 최초의 우주 비행을 한 구 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 한 바퀴를 돌고 귀환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구 밖에 나가보니 궤도 어느 곳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9년 뒤, 소련에 뒤질세라 급해진 미국은 1969년 닐 암스트롱을 아폴로 11호에 태워 달로 보냈습니다. 달 착륙을 무사히 경험하고 돌아온 닐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 밖으로 나가보니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나눌 수 있는 화두는 이렇습니다. 신앙의 스토리는 과학적인 접근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믿음으로 해석해야 하는 필드라는 점입니다. 마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동일한 맥을 갖습니다. 부활신앙도 매일반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예수부활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성찰을 남겨놓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그의 신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예수의 신성에 부합한다는 것이다.”(p,77) 존 스토트의 이 갈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마지못해 인정하는 어처구니없는 불신앙적인 신앙을 가질 때가 많지만, 존 스토트 목사의 강력한 일침은 부활이라는 단어가 부합할 존재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단어이자 개념이기에 부활이 믿어지려면 반드시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밑그림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은 이론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을 이론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에게 내일을 증명하라는 것이고, 매미에게 내년을 설명하라고 압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철저한 신앙적 고백사건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본문 이해를 도전해 보겠습니다.
본론) 대체적으로 신약학자들은 마태복음 28:1-8, 마가복음 16:1-8, 누가복음 24:1-12, 그리고 오늘 본문을 후대 복음서 사가들이 첨가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의 복음서에 기록된 구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종결되었다고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간 사건이 4복음서에 삽입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제자공동체에 있었던 복음서 기록자들이 속죄의 차원에서 이 증언들을 찾아 집어넣었을 것이라고 고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단 한명의 예외 없이 그 자리를 지킨 자들이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여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골고다에 올라갔고 더불어 무덤으로 찾아가 예수를 장사지내려고 했던 헌신의 극치를 보여준 진짜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준 여성들에 대한 감사와 본인들의 부끄러움을 뒤늦게라도 사죄하는 마음으로 본문이 복음서에 삽입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의 힌트는 눈여겨 볼만한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전제하는 대단히 중요한 사전적인 은혜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성들의 믿음은 제자들의 믿음을 뛰어넘는 위대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또 다른 일련의 여성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10) 이들이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아간 이유는 부활신앙 때문이 아니라 죽은 자를 장사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일행이 무덤에 이르러 보니 무덤 문은 굴러내려 갔고 주님의 시체는 보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문 밖에 서서 하염없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울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클라우사’는 비통하여 대성통곡하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주님의 시체를 잃어버렸다는 충격으로 인해 대성통곡을 한 것입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의 그 신앙은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니 로마의 군사들이 몇 겹으로 지키며 살벌하게 파수하는 무덤까지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들이 주님이 그토록 말씀하시고 강조하셨던 부활의 사실을 무덤까지 가서 무덤 문이 열려 있고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도 믿지 않고 울고 있었던 것은 조금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연약한 인성을 무기로 삼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성들의 대한 해석은 여기까지 하고 바로 그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주셨습니다. 본문 15절 전반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15절 후반절입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이 구절을 대하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동이 저에게 밀려왔습니다. 주지했다시피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이때까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단한 감동을 주는 구절이 여기에 실려 있습니다. “내가 가져가리이다.” 부활하신 주님과 나누는 대화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적어도 이 발언은 엄청난 고난을 각오한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의 시체가 사라진 긴박한 상황아래에서 가장 민감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본디오 빌라도의 수졸들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해 받기 십상인 긴장된 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민감한 예수님의 시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요구한 것은 대단히 위험천만의 행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본문 이해를 더 나아가십니다. 이 고백을 한 막달라 마리아의 토로에 맞는 해석인지는 모르지만 설교자인 저의 주관적인 해석을 첨언한다면 주님이 이 순간 감동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왜요? 당신을 드디어 현현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6-18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은 당신을 현현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이 때 받은 감동은 아마도 이론으로 충분히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서 본문 저자는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붙들려고 했음 정도로 가늠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만류하며 다음의 미션을 줍니다. 내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제자 공동체에 가서 알리라는 미션이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을 목도한 막달라 마리아는 불안에 떨며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소식을 알리기에 이릅니다. 여인의 소식을 전언 받은 제자들의 행보는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후담을 기록한 누가복음의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9-12절입니다.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저는 바로 이 구절에서 왜 복음서 기자들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간 사건을 속죄의 심정으로 바로 이 필드에 기록했는지를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받은 베드로는 성격 그대로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주인 잃은 세마포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대되는 베드로의 후속 행동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먼저 가시겠다고 한 갈릴리로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갈릴리로 가서 그렇게도 아쉽게 결별했던 주님을 만나 사죄를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의 행보가 무엇이었습니까? ‘집으로 돌아가니라’였습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베드로가 행했습니까? 부활신앙에 대한 확신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소개한 두 사람을 놓고 2019년 부활주일 아침의 교훈을 받겠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도 집으로 돌아간 베드로,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배우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에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분명히 보입니다. 흔적의 차이입니다. 본문 제목으로 대입하겠습니다. 스티그마의 차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적어도 부활신앙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다 오십 보 백보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또 한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의 상징만을 확인했다는 차이입니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막달라 마리아이고, 후자는 베드로입니다. 그렇다면 2019년 부활주일 아침, 밀어닥치는 은혜를 이렇게 나누고 싶습니다. ※ 주님을 스티그마로 새기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중에 저에게 대책 없는 목사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는 것도 기적인데 부활한 주님을 만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고 항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왜요?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울고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재철 목사는 ‘매듭짓기’라는 책에서 예수의 부활의 확실성을 네 가지로 전언하고 있습니다. (PP,37-38) ⓵ 믿음의 대상인 성경이 예수의 부활을 확고히 증언한다. ⓶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새로워지고 있다. ⓷ 예수님에겐 무덤이 없다는 점이다. ⓸ 확고한 제자들의 증언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존 스토트도 이렇게 부활의 확실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며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기본진리, PP,78-92) ⓵ 시체가 없다. ⓶ 수의가 헝클어지지 않았다. ⓷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다. ⓸ 제자들이 변화되었다. 저는 이 두 신앙의 선배가 제시한 의미 중에 같은 공통분모에 주목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변화시키셨다는 팩트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확실하게 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그들을 변화시키셨다면 그 만남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말입니다. 지난 주간, 6일 동안 집회를 열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스티그마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 반대로 그 스티그마를 새기기 위해 사모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누구를 만나십니까? 사모하는 자를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주간 사역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곱씹었습니다. 선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결단코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다지기도 했습니다. 만들어진 성령이나 내가 조각해서 인위적으로 나에게 맞추어진 가짜 성령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나를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이끄시는 올바른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몸부림치기로 했습니다. 예수 당신이 나의 영원한 주군이심을 인정하고 이해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순종의 믿음으로 예수께 집중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도 나에게 오셔서 만나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움직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누구나’의 주님이시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부활의 은혜는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자는 무덤으로 먼저 달려가는 자의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을 만나주십니다. 적어도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은 주님의 시체가 없는 빈 무덤을 보고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허접한 무늬를 갖고 있는 가짜 그리스도인 되지 말고, ‘내가 가져가리이다.’의 일사각오의 신앙적 무게를 가져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날마다 만나 주시는 신실한 크리스티아노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김기석 목사는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에서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평생을 나누며 살았던 예수회 사제인 헨리 나우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나우웬은 ‘시름하는 동조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들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꿈을 공유하면서 나름 자기의 삶을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이다.”(p,310)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가장 목사에게 참담하게 다가오는 아픔은 신자들 중에 ‘시름하는 동조자’ 조차 되지 않으려는 이기적 집단이 교회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스티그마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스티그마를 새기기 위해 시름하는 동조자로 살고 계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때마다 시마다 분마다 초마다 만나주시는 스티그마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 감격으로 인해 울컥하는 영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까? 단 한 순간도 이런 감동이 없이 살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이 살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배짱 좋게 살고 있습니까? 부활주일 아침, 진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는 자는 삶에서 이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 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활 바위 시요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 되시니 나를 따를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으로 내게 씌우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