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21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3:26-29 제목: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서론) 오늘은 2019년도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동시에 고난주간도 진행됩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일체의 절기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성찰을 해야 하는 시기가 이번 주간이기에 저도 교우들도 삼가 근신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이 구절을 영어성경의 고전인 RSV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including yourselves who are called to belong to Jesus Christ.” 번역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일컬음을 당하는 너희들 스스로” 제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속해 있다’는 구절 때문입니다. 학부 시절, 대학생선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을 때 김준곤 목사께서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김 목사께서 결단의 시간에 외쳤던 100대 문답이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물었던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것입니까? 질문이 떨어지면 집회에 참석했던 대학생들이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때를 상기하면서 저도 한 번 묻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들입니다. 지난주간에 산척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마침 심방대원이 우정제권사여서 친정어머니께서 머물고 계시는 산척 집을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른 교회 목사이기에 목회의 윤리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정중하게 어머니권사님께 예배 허락을 받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가 370장을 부르라는 조명이 있어서 함께 찬양을 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그런데 찬송을 부르던 중에 갑자기 어머님 권사님께서 우 권사님의 손을 살며시 붙들고 포개셨습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우 권사님도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함께 울며 찬양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 날 두 분이 붙는 손, 그리고 함께 감사의 울음으로 드린 찬양을 부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녀지간의 사랑을 뛰어 넘어 이게, 진짜 교회고, 이게 성도의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왜 그렇습니까? 모녀지간에 피를 나눈 혈육의 정 플러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영적인 보혈의 피까지 함께 공유한 성도가 누릴수 있는 최고의 삶을 그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예수의 것이라고 인침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난주일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레마로 이 교훈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본론) 1) 어떤 경우에도 누구를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8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파격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언에 의하면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3대 감사 기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⓵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 ⓶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 ⓷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 사정이 이런 데도 바울이 28절을 선포했다는 것은 역적 중에 역적임을 시인한 것입니다. 왜요? 바울은 일종의 모든 차별을 배격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울은 당시 가장 예민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종이나 노예에 대한 계층에 대한 차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심각한 차별 정책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은 반항아였습니까? 시대의 구도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이단아였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바울처럼 지성적이고, 영적이고, 보편적인 박애주의 정신을 갖고 있었던 자가 과연 누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왜 바울은 차별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배격하였을까요? 본문 28절을 다시 복습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일체의 차별을 배격해야 함을 바울은 역설합니다. 왜? 그 분 안에서는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종도, 자유인도, 여자도, 남자도 믿음을 갖고 있으면 구원 받은 백성이 된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다양한 종류의 일체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마지막 29절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어 했던 최종 결론의 용어가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면 다 하나다.” 이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인정받은 우리들은 어떤 종류의 차별도 배제해야 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칼에 찔러 사망한 사건으로 인해 나라가 들썩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이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여성 혐오주의자에 의한 계획적인 범죄로 밝혀져서 더 큰 사회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성을 혐오하는 일들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성 혐오주의는 사안의 무게가 대단히 복잡한 사회심리학적인 요인들을 갖고 있기에 단칼에 무 자르듯이 명쾌하게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접근하여 가장 두드러진 답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이런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차별이 팽배한 사회적 성향 때문이다.” 저는 남성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중립을 지키려고 한다할지라도 남성편의주의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논할 때는 더 더욱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논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가 유교적인 전통에 서 있다는 것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뿌리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해석은 세속적 관점이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목사인 제가 당연히 관심을 갖고 있는 성서 텍스트의 내용이 가끔은 충격적일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서의 한 면들을 기록한 기자들 역시 상당히 가부장적인 냄새가 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구약 성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약성서도 이 점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신학적 입장입니다. 한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교우들에게 요한복음 8:3-5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 신약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구약성경 두 구절을 나누어야 합니다. 먼저 레위기 20:10절을 읽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한 구절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신명기 22:22-24절입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이 두 구절의 공통점이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간음과 간통의 경우 대상자 두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셨다는 점입니다. 대상자 남성과 여성 둘 다를 처결하라는 엄숙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소개한 요한복음 8장 텍스트에서는 둘 중에 남성이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8:3-11절 기사의 요는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자에 대한 정죄와 용서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종교적 위선을 책망하기 위한 메시지라고 에두르면서 간음 사건에 대하여 즉답을 피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답을 말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왜 이 메시지에서 음부(淫婦)라고 여겨지는 여성만 존재하고, 간부(姦夫)인 남성이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답해야 합니다. 불편하겠지만 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기사는 요한 저자의 보고가 아니라는 점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자에 대한 담론은 후대에 요한복음을 정경화 하던 편집자들이 부가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학자들의 정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기사는 초기 사본에 빠져 있거나 아예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주 성경을 보면 이 기사는 괄호 묶음 안에 들어가 있도록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편집사가들에 의해 여기에 위치해 놓도록 가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과의 본격적인 세 대결이 시작되는 단락이 요한복음 8장이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기사를 편집되었을 때를 주후 90년 즈음으로 보는데 이 때의 사회적 정황은 대단히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였고 해서 간부를 함께 등장시키는 것에 적지 않은 불편함을 느낀 기자들이 의도적으로 남자는 삭제했다는 학자들의 해석에 저 또한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8장의 성서 편집 기자들의 편향은 충분히 차별적이었다는 점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축자영감설에 대한 위험성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성경이 자간자간(字間字間) 단 한자의 오류가 없다고 믿는 근본주의적인 폐쇄적인 신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정경화한 자들이 완벽하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벽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제시된 여러 시대의 정황은 각종 차별함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여성과 남성, 노예와 주인, 고용자와 피고용자, 귀족과 평민 등등 성경의 시대마다 차별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이 분명했던 성경 시대에 차별주의를 아주 단호하게 한 마디로 척결하는 선포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선언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의 것인 저와 여러분은 일체의 차별과 맞서야 합니다. 2)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7절을 다시 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는 옷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함을 권고한 것입니다. 신학교 시절, 예비군 훈련을 학생 대대에서 처음 갔을 때 본 광경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뒷자리에서 잡담하는 사람, 신문 펴고 딴 짓하는 사람, 코 골며 자는 사람 등등 정말로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훈련 받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목사, 전도사라는 점입니다. 교회에 지도자들입니다. 만에 하나 교회에서 성도가 예배 시간에 잡담을 하거나, 설교 시간에 신문을 보며 딴 짓을 하거나, 코를 골며 자는 사람이 있으면 불호령을 내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비군 교육 훈련 중에 이렇게 완전히 딴 사람이 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예비군복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위상과 신분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그 분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합니다. 조금만 실제적으로 발언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굳이 조금 더 강한 표현을 쓰자면 성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조금은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불편해도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원영 변호사는 골형성부전증이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장애우입니다. 그는 평생 걷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성장기 내내 이런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점철된 인생의 사고를 한 때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받은 존엄의 삶을 경험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본인의 저술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소개합니다. 한 여름 어느 날, 동네 친구들이 매우 더운 탓에 계곡으로 놀러 갔습니다. 장애를 갖지 않은 친구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계곡 물에 풍덩 빠졌는데 유독이 한 친구가 저자를 떠나지 않고 같이 있고자 해서 수영을 하기 싫은 것이 본 마음이 아닌 것을 안 작가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타박을 주었습니다. “야, 인마! 빨리 수영 좀 가라, 난 낮잠 좀 자야겠어!” 그러자 한 친구가 작가가 있는 공간에서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 피부 관리해야 돼!” 그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작가는 더 강하게 타박한 뒤에 그를 강제로 내쫒다시피 한 뒤, 저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친구의 이 말은 그야말로 “존엄의 퍼포먼스였다.”(p,65) 장애우를 둔 친구에게 비 장애우로서 본인이 가진 마음이 동정심이 아니라 절대로 장애를 차별하지 않으려는 최고의 대우라는 것을 알았던 저자는 이후로 장애인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어 결코 차별당하지 않는 장애우들을 위한 세상 만들기에 오늘도 경주하고 있음을 보고합니다. 책에서 이 글을 읽다가 괜한 그리고 생뚱맞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것임을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나 피부 관리해야 돼!’ 라고 말할 줄 아는 성별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1:45절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여기에 두 번이나 기록된 ‘거룩’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도쉬’는 폼 잡는 외형적 거룩이 아닙니다. 박사학위 가운 입도 나와 강단에 서는 값싼 거룩이 아닙니다. 강대상만 올라가면 이상한 톤으로 바뀌는 음성으로 말하는 가식도 아닙니다. 금식을 떠벌이기 위해 초라하게 보였던 제사장들의 내세움도 아닙니다. 찬양을 할 때 감성을 터치하여 인위적으로 사람을 울리는 그런 모양새의 거룩도 아닙니다. 히브리어 ‘카도쉬’ 즉 ‘거룩’은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것입니까? 그렇다면 주류에서 분리되십시오. 하나님 없는 번영의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값싼 싸구려 복음에 열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물러 서십시오. 나에게 엎드리기만 하면 이 모든 천하에 속한 영광과 부귀를 네게 줄 것이라는 소리를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고 선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요, 구별이요, 성별됨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입니다. 지난 다섯 주에 걸친 사순절 기간 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야! 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셨습니까?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반드시 정직하게 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구별된 삶을 사셨습니까? 세속의 영광과 분리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까? 김기석 목사가 ‘가시는 길 따라 나서다’에서 이렇게 갈파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이를 돕는가? 가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는가? 입니다. 근본이 서면 나머지는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p,133) 적어도 우리 세인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일체의 것들을 행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 행함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구별 됨이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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