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화요일) 묵상 – 사순절 20번째 날 예민하자. 주님께서 등 돌리지 않으시도록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81편, 창세기 29:1-14, 고린도전서 10:1-4 꽃물 (말씀 새기기) 시편 81:11-12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마중물 (말씀 묵상) ‘유기(遺棄)’라는 단어는 사실은 대단히 무서운 단어다. ‘내다버렸다’는 의미의 방치를 표현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버렸다고 표현하셨다면 대단히 속이 상한 상태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기실, 하나님께서 노하신 이유는 한 구절만 보더라도 익히 짐작이 간다. 소리를 듣지 않음, 원하지 않음 자식이 부모의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순간부터 관계가 단절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품고 있은 속상함이 바로 듣기 싫어함과 원하지 않음이라는 관계 파괴 때문임을 시인은 토로한다. 이런 단절, 관계 파괴가 가져온 재앙이 바로 하나님이 결심하신 유기함이다. 복음서 안에 담겨 있는 예수의 공생애 내용 중에 가장 쓰라린 순간을 뽑으라면 가상칠언 중에 제 사언(四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실 때가 아닐까 싶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당신의 뜻을 펴나가심에 있어서 수많은 질고와 고통과 핍박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혹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연대감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후, 상황은 180°로 바꿨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등을 돌렸다. 격정적인 반전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과장일까?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심 물론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심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순간이라는 역학적 구도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 의미를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버림을 당하는 순간의 고통을 주께서 표현하신 것이 바로 四言이다. 그러나 이런 한시적 유기가 아닌 영원한 유기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재앙의 극점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한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분명한 유기다. 내버려 둠이라니! 목양의 현장에서 정말 민감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민감성이다. 하여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한 민감성을 갖고 사는 것은 성도가 지녀야 할 당위다. 사순절은 이런 민감성을 다지는 시간이어야 한다. 두레박 (질문) 나는 영적으로 얼마나 민감한 죄책을 갖고 사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주님의 숨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 예민함까지. 그런 민감함을 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주님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나도 주님께 집중하는 기도하는 삶을 소홀히 하지 말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교단 총회가 있는 날입니다. 한국교회가 많이 어렵습니다. 어떤 교단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들을 긍휼히 여겨주소서. 교회가 다시 살게 해주십시오. 성총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