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주일) 묵상 – 사순절 열한 번째 날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오늘의 성서일과 창세기 12:1-4a, 시편 121편, 로마서 4:1-5, 13-17, 요한복음 3:1-17 또는 마 17:1-9 꽃물 (말씀 새기기) 마태복음 17:4-5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마중물 (말씀 묵상)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의 고백이다. 그가 보았던 것이 예수님의 변형이었고, 그 변형의 모습은 영적 황홀함 그 자체였기에 그리 큰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복음서 기자는 그 황홀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기술했다. 왜 이렇게 기술했을까? 이어지는 마태복음 17:14절 이하의 사건 때문이었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9명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황당함 때문이었다.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치유를 위해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전혀 호전되지 않아 난감한 상태였다. 결국 산에서 내려오신 주께서 그 아이를 고치심으로 일단락된다. 혹여 이 기사에 대하여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예수님의 질책으로 사건 추이를 몰고 가는 상투적 해석에 대해 부인하려고 하는 의도로 성서일과를 보았다고 여기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산 아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요구대로 산 위에서 초막 셋을 짓고 있으면 산 아래는 절망이다. 그렇다면 이타적인 주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을 향해 이기주의가 그 기다림을 뭉개는 결과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 그 황홀했던 주님의 변형된 모습이 사라진 것은 이기주의가 승리하도록 방치하지 않은 이타주의의 승리를 위해서였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라고 강권했던 본회퍼는 그래서 옳았다. 두레박 (질문) 나는 초막 셋을 짓는 것을 만족하는 목사인가? 질문해 본다.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한 세상입니다. 세인 교회가 어떤 사역을 해야 하는지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인 공동체는 끝까지 이타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나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교회가 되도록 민감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오늘 주일 사역을 주께 의탁합니다. 모두가 영적으로 기쁘고 만족한 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