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월요일) 묵상 나는 나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9:9-16, 출애굽기 20:1-21, 야고보서 1:2-8 꽃물 (말씀 새기기) 출애굽기 20:20-21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이 구절을 읽는데 갑자기 울컥해진다. 나이가 들어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탓에 ‘울컥’의 횟수가 많아진 게 아니다. 갑자기 울컥해 진 것은 ‘백성은 멀리 서 있고’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나는 ‘꼰대’라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워 멈칫 하는 성격은 아니다. 누군가는 꼰대 소리를 들어야 그래도 뭔가 잘못 돌아가는 작금에 저지선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듣는 지 안 듣는 지는 내 몫은 아니니까 별 상관은 하고 싶지 않다. 오늘 이 시대, 내 사랑하는 주군이신 하나님에 대한 현대인들의 평가는 거의 절망적이다. 영성신학자인 제임스 패커의 글이 오롯이 생각난다. “최근에 어느 신학생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시험 문제에 대해 A학점을 받은 답안의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정답은 이랬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제멋대로 주물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에 열광하는 시대다. 이런 경악함을 자행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는 시대가 오늘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백성이 멀리 서 있고’라는 구절에 울컥한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 나도 하나님을 향한 이해나 경배의 측면에서 이렇게 반응했던 것 같다. 도저히 나의 죗성으로 인해 가까이하기가 거북한 존재, 그래서 왠지 모를 경외감에 사로잡힌 존재가 하나님이었다. 잘못 배워도 한참을 잘못 배웠다고 조직신학자들이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뭐 그러려니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 이론적 정의에 대해 대단히 고루하고 근본주의적인 접근을 하는 목사라고 나를 공격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공격을 받아도 나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인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고, 나를 향해 수없이 인내하고 참으시며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마음껏 의미를 부여하는 데로 만들어지는 분이 아니라 나에게는 의미 그 자체이신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이시다. 나는 모세가 십계명을 하사 받을 때, 산 밑에 있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왜 하나님에게서 지근거리가 아니라 멀러 서 있으려고 했는지 이해한다. 그들의 거리두기가 문제로 보이지 않고 아름다워 보였다. 따지지 말자. 내 마음이다. 나는 내 하나님이 나와 다르신 격이 있으신 분임에 열광한다. 나는 이렇게 살려 한다. 두레박 (질문) 하나님을 마음대로 만드는 시대, 하나님이 가장 업신여김을 당하는 시대에 그 반대로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무엇일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당신이 치욕당하지 않도록 잘 살게 해주십시오. 그래도 나는 당신의 자녀인데, 나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이 모욕당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옳게 살게 해주십시오. 부끄럽지 않게 살게 해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나는 나다’라는 선언에 합당한 믿음을 갖고 그렇게 인정하는 자들이 많아지도록 노력하는 한 주간의 삶을 살아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제 삼자가 나 때문에 상처당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날이 되도록 나와 제 삼자를 은혜로 견인하여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