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수요일) 묵상 참 거시기하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37:1-17, 룻기 3:1-13; 4:13-22, 누가복음 6:17-26 꽃물 (말씀 새기기) 시편 37:16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마중물 (말씀 묵상) 시인의 고백이 웃프다. 왜? 영적 정서로는 100번도 더 아멘을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로 사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를 강조하며 단 위에서 외치지만, 주머니가 비어 있으면 움츠려 드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 물질 때문에 쫄지 않았다. 내가 그만한 영성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않으면 넘어질 것이 1,000%이기에 긍휼이 여기셨다고 말 할 수 있는 것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내게 숙제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다. 악인으로 풍부함 삶을 사는 것은 거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사는 것이 왠지 모르게 쪽(?) 팔리기 때문이다. 목사가 갖고 있는 마지노선적인 자존심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후자는 경계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의 영성을 견지할 수 있다면. 문제는 전자다. 즉 의인의 소유가 적은 것에 대한 딜레마다. 물질이 지금보다 조금 더 많으면 소박하게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만에 하나,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일들은 멋진 일이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할 말한 여유를 주시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위하는 것은 지금 있는 것만큼만 멋진 일을 하자라는 식의 위로다. 멋진 것이라고 하니까 뭔가 폼생폼사 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싶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정말로, 내가 물질을 투여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력이 없어 두 손 들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하나님께 요구하고 싶은 게 속물근성이지만 하나가 있다. 하나님, 의인은 소유가 조금 많으면 안 되나요? 이렇게 말하니 내가 곧 의인인 것 같아 질문을 삭제한다. 언젠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책임자로 있는 동역자가 했던 말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그냥 발언한 것은 푸념으로만 남기고 싶다. 그가 엄하게 말했다. “부유함을 누릴 때, 이미 그는 의인이 아니다.” 그의 말이 법은 아니지만, 항상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는 편이라 이럴 때 조금은 거시기하다. 두레박 (질문) 하나님, 지금보다 제게 지갑을 조금만 더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만 더.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제 주변에 두 렙돈이 생활비 전부인 것으로 살아가는 지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지 않게. 나비물 (말씀의 실천) 내가 나눌 수 있는 여력을 조금 더 민감하게 성찰해서 나누는 데에 최선을 다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부족한 사람이 참 존경하는 선배가 육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가 건강해야 합니다. 주님, 한국교회를 위해서는 선배가 조금은 더 건강해야 합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선배를 치료하여 주옵소서. 저는 아직도 그 선배를 통해 주워 먹어야 할 부스러기가 너무 많습니다. 아직도 저는 배가 많이 고픕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