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2.04.01 셀 사역2024-04-22 11:4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미디어 금식을 통해 내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고 생각하는 항목 선정하여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찬송가 407장)
● 얼마나 아프셨나 (찬송가 614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마가복음 13:3-6    내 이름으로 
1) 세 명의 제자들이 주님에게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때와 징조를 질문한 참 의도는?
본문 4절과 설교를 참고하세요.  

2)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의 내가 가장 빠지기 쉬운 미혹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중심으로 한 설교를 되새김질함으로 말해 보자.  

3) 내가 주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역을 생각하여 말해보자.
설교의 적용을 1인칭 화시켜 고백해보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1. 서부동의 새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승리하도록.
① 매 주일마다 새신자가 등록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② 서부동 엘 벧엘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2. 고난주간 미디어 금식에 동참하게 하소서.
① 미디어 금식을 방해하는 어떤 유혹도 기도로 이겨내게  하옵소서.
② 미디어금식 기간 중 유혹에 넘어가 혹 실수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꽅까지 지키게 하옵소서.
③ 미디어금식을 통해 얻은 시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게 하옵소서

3.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붙들릴 수 있는 제천지역의 잠재적 그리스도인들을 일군으로 보내 주옵소서.
① 하나님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생각, 같은 행동으로  같은 비전을 꿈꿀 수 있는
  일군을 보내주옵소서.
②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 십자가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일군이 양육되게 하옵소서.
③ 하나님의 교회로 제천지역의 젊은 일군들이 몰려오도록(주일학생, 중고등부 학생, 청년 대학생)

4. 엘 벧엘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휘몰아치게 하옵소서.
① 성령보다 앞서지 않게 하옵소서.
② 성령보다 뒤쳐지지 않게 하옵소서.
③ 성령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④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사역하게 하옵소서.
⑤ 그 결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5. 우리 교회 두 날개 양육 시스템으로 통한 재생산  사역자들이 양성되게 하옵소서.
① 양육 2기를 위해
② 제 2회 전인적 치유 수양회를 위해
③ 4월에 실시될 열린 모임학교를 위해
④ 제자대학 1학기를 위해 (5월 중에 개강 예정)

6. 우리 교회 전인적 소그룹의 12진(陣)을 위하여
① 셀이 영적 재생산 사역의 캠프가 되게 하옵소서.
② 친교 단체가 아닌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대적하는 보루가 되게 하옵소서.
③ 12월에 번식을 향해 달려가는 진(陣)되게 하옵소서.

7. 우리 교회 예배당 건축 후의 앞으로의 여정을 지켜주옵소서
① 4월 입당예배가 잘 준비되게 하옵소서. (조경공사, 기도실 공사 등등)
② 2015년에 하나님의 교회를 헌당하게 하옵소서.
③ 손동만 집사를 끝까지 축복하옵소서.

2) 헌금 / 광고
3) 주기도문
4) 목원들의 기도제목 나누기  

 
설교요약 (SUMMARY)
2012년 4월 1일 종려주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112번째 강해)
제목: 내 이름으로 /  본문: 마가복음 13:3-6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인류 구원의 귀한 사역을 실천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시는 날, 정치적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연호하던 바로 그 날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이어 종려주일로 시작되는 이번 주간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신하며 경건하게 보내야 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간이기도 합니다.
2012년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000여 년 전에 골고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주님의 고난의 절정이 그냥 2000 년 전에 팔레스타인의 한 조그마한 시골 출신의 청년이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 주창하면서 예루살렘 종교의 심장부에 칼을 겨누고 그들의 견고한 아성에 도전장을 냈다가 결국 그들의 기득권적인 폭력에 의해 누명을 쓰고 십자가형 이라는 중죄인들이 당하는 형벌로 비참하게 죽은 마리아의 아들이었던 역사적 예수의 고난으로 인식한다면 우리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인데 그 신앙의 대상이신 주님으로부터 너는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아주 무서운 비극입니다. 이에 반해 가장 행복한 자는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와 있는 기사를 통해 주님과 소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한 가지의 교훈에 천착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본문은 헤롯 성전을 빠져 나오신 예수께서 그 성전이 바라보이시는 반대편 감람산에 도착하시자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중요한 인물들로 부각된 3명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요한이 동일하게 같은 공통분모를 갖고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기사입니다. 본문 4절에서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은 이미 지난 주에 선포하여 우리들이 잘 아는 내용처럼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주님의 예언이 언제 즈음 일어날 것인가? 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의 질문이었습니다. 도무지 너무나 든든하여 파괴될 수 없을 것 같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진정성을 묻는 질문이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져 있는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들은 때를 물었고, 징조의 확실성을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혹시 주님께서 성전 파괴에 대한 이야기를 뒤집어 업는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면서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님은 마가복음 13장에서 아주 선명하게 몇 가지의 징조들을 선언하시기에 이릅니다. 그 첫 번째의 내용을 본문 5-6절에서 살펴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말씀의 요는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5-6절에서 두 번에 걸쳐 나온‘미혹하다.’라는 헬라어 동사‘플라나오’는 어원적인 의미가 어떤 목적한 지점에 도착하지 못하게 길을 이탈하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미혹에 빠져 있다고 표현할 때 제일 현실적인 해석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말과 가장 가깝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할 것은 신앙의 길을 잘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유명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주님이 마귀에게 받으신 세 가지의 유혹은 ①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②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③ 사탄에게 엎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는 아주 중요한 도전은 우리들이 아주 단순하게 가져야 하는 상식의 삶이 있습니다. 첫째, 떡은 돌로 만들 수 없다는 점입니다. 떡은 곡식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둘째, 성전의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최소한 다리가 부러지든지 아니면 경우에 따라 사망합니다.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아야 너의 특별함을 인정해주겠다는 사탄의 저의는 기본적인 상식의 법을 일탈하라는 비상식의 요구입니다. 셋째로 사탄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도 비상식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이 아닙니다. 사탄이 주님에게 요구한 것은 세 가지 모두 상식의 길에서 이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서 빠져 나오라는 술책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사탄의 방법이요 전략입니다. 이것을 아셨던 주님은 단호하게 사탄의 길 이탈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본문 6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말씀합니다. 가장 곤혹스러운 심각성은 ‘내 이름으로 와서’입니다. 주님이 경고하신 종말론적인 징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예수 이름으로’미혹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상황이 되면 우리는 모두가 적그리스도의 출현 정도로 해석하기에 동의합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이단아들이 등장하고 최후에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바로 이 성경 말씀으로 해석하기에 이릅니다. 극단적이고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은 여기에서 출현을 예언한 주님의 그 대상이 교황이라고 말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들보다 시대 말의 현상 속에는 거짓 선지자들의 출몰과 적그리스도적인 강력한 기독교 복음의 무력화 작업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라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의 주님의 경고성 발언의 심각성은 교회 밖의 타자에게서 붉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신앙 속의 불신앙에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내 이름으로 와서’의 가장 치명적인 영적인 미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삼는 일체 행위입니다.
* 하나님의 이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일체의 행위이다.
본문 6절에서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온 사람들이 자행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내가 그로라’로 정의합니다. ‘내가 그로라’는 말의 참 뜻은 그가 진짜가 아닌데 진짜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은 학문적으로 말씀드린다면‘예수 이름 남용’일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남의 이름을 도용하면 형사적인 처벌을 받게 되는 질 나쁜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도 쉽게 주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남용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세대 차준희 교수가 쓴‘교회에 다니면서 십계명도 몰라’라는 십계명의 현대적인 이해에 관한 글 중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3계명은 “유대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다가‘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 'YHWH(야훼)'가 나오면 그 이름이 너무나 거룩해서 그 이름을 읽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 (중략) 그들은 그 글자를 부득이 옮겨 쓸 때에는 쓰기를 멈추고 몸을 씻고, 손도 씻고, 잉크를 새 것으로 간 뒤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한 자씩 한 자씩 기록하였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이름을 부르기에도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지존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하고 존귀하신 이름을 우리들은 예수님 때문에 마음껏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14-17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선포하셨습니다. 도무지 타락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우리들을 예수께서 대속해 주심으로 인해 이제는 그 존귀한 이름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엄청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그 분의 이름을 업신여긴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는 점입니다.
근래 들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 세인 지체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당신 안에서 감격의 이름으로 꿈툴 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정황 안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목적입니까? 아니면 수단입니까? 이제 우리는 국민소득이 종교가 취미로 변질되는 시기인 10,000불의 시기가 아닌 그 배인 20,000불이 넘어선 풍요로운 물질적인 시대에 예수라는 그 분은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존재이십니까? 예수는 당신의 목적이십니까? 아니면 수단이십니까?
만에 하나 당신의 마음의 여백 안에 예수께서 나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오늘 마가복음 13:6절에 기록하고 있는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고 미혹하고 있는 자에게 미혹당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더 심각하게 내가 그로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당신임을 명심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삼지 마십시오. 주님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그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반드시 오셔서 당신을 계산하실 주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임을 명심하십시오.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달려가는 당신을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반드시 오셔서 계산하신 후 그 날 주님의 품에 당신을 안으실 분임을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