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2.03.18 셀 사역2024-04-22 11:4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돈이 제일 좋다고 느껴질 때가 언제였는지 솔직히 고백해보자. 동시에 돈이 정말로 헛된 가치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동시에 나누어 보자.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게 있는 모든 것을 (50장)
●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대로 (찬송가 49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마가복음 12:41-44  돈 내셨습니까?
1) 주님께서 헤롯 성전 여인의 뜰 맞은편에 앉으셔서 보셨던 본문에 나타난 두 가지의 현상은 무엇이었는가?
① 본문 41-42절을 중심으로 말해보자.  

2) 주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이 부자들이 많은 동전을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라고 역설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본문 43-44절을 중심으로  

3)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돈을 냈는가? 내 전부를 포함한 헌금을 드렸는가?
담임목사의 선포된 말씀을 중심으로 진정성 있게 고백하고 후자를 결단하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1. 서부동의 새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승리하도록.
① 매 주일마다 새신자가 등록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② 서부동 엘 벧엘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2.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은혜에 깊이 잠길 수 있도록.
① 가장 말을 적게 하는 기간이 되게 하옵소서.
② 기름부음이 충만한 나날이 되게 하옵소서.
③ 주어진 말씀의 일과대로 성서와 가까이 하는 기간이 되게 하옵소서.
3.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붙들릴 수 있는 제천지역의 잠재적 그리스도인들을 일군으로 보내 주옵소서.
① 하나님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생각, 같은 행동으로 같은 비전을 꿈꿀 수 있는
  일군을 보내주옵소서.
②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 십자가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일군이 양육되게 하옵소서.
③ 하나님의 교회로 제천지역의 젊은 일군들이 몰려오도록 (주일학생, 중고등부 학생, 청년 대학생)
4. 엘 벧엘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휘몰아치게 하옵소서.
① 성령보다 앞서지 않게 하옵소서.
② 성령보다 뒤쳐지지 않게 하옵소서.
③ 성령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④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사역하게 하옵소서.
⑤ 그 결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5. 우리 교회 두 날개 양육 시스템으로 통한 재생산 사역자들이 양성되게 하옵소서.
① 양육 1기 A,B 반의 은혜로운 과정을 위해 (3월 중에 졸업 예정)
② 양육 2기 개강을 위해 (3월 중에 개강 예정)
③ 제 2회 전인적 치유 수양회를 위해 (4월 중에 개강 예정)
④ 4월에 실시될 열린 모임을 위해
⑤ 제자대학 1학기를 위해 (4월 중에 개강 예정)
6. 우리 교회 전인적 소그룹의 12진(陣)을 위하여
① 셀이 영적 재생산 사역의 캠프가 되게 하옵소서.
② 친교 단체가 아닌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대적하는  보루가 되게 하옵소서.
③ 12월에 번식을 향해 달려가는 진(陣)되게 하옵소서.
7. 우리 교회 예배당 건축 후의 앞으로의 여정을 지켜주옵소서
① 4월 입당예배가 잘 준비되게 하옵소서. (건축 허가, 조경공사, 기도실 공사 등등)
② 2015년에 하나님의 교회를 헌당하게 하옵소서.
③ 손동만 집사를 끝까지 축복하옵소서.

2) 헌금 / 광고
3) 주기도문
4) 목원들의 기도제목 나누기  

 
설교요약 (SUMMARY)
2012년 3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가복음 110번째 강해)
제목: 돈 내셨습니까? / 본문: 마가복음 12:41-44
우리는 지난 주일 마가복음 강해를 통해 서기관들에 대하여 경계할 것을 지시하는 주님의 메시지를 접했습니다. 그 중에서 마가복음 12:40절 전반절에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주님이 지적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피츠마이어 교수의 해석을 첨부하면 어떤 한 과부가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이 여인은 고인이 된 남편이 남기고 간 재산을 잘 관리하기 위해 당시 변호사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위임된 서기관에게 재산 관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재산을 서기관이 손을 대고 착복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부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남편을 여읜 뒤에 오는 외로움이었고 둘째는 생활고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 지근에 살고 있었던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한 과부로부터 사건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헤롯 성전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헌금 궤 맞은편에 앉아 계셨습니다. 당시 헤롯 성전의 구도는 성전의 가장 바깥쪽에는 이방인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된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 뜰 안에서 성전 안으로 조금 더 들어오면 여성들이 성전에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인 여인의 뜰이 나옵니다. 그 뜰 쪽을 마주보이는 곳에 우리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바로 그 미문(beautiful gate)이 있습니다. 본문을 주목하면 예수님은 바로 이 지점 어느 곳에 앉아계셨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본문 41절에서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경에는‘대하여’라고 번역된 전치사‘카테난티’는 ‘맞은편’,‘반대편’의 의미를 갖고 있는 전치사입니다.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최후의 마지노선은 여인의 뜰인데 그 뜰이 아주 잘 보이는 것이 맞은편이었기에 미문이 맞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렇게 여인의 뜰이 잘 보이는 미문의 한 곳에 앉으셨던 것입니다.
그곳에 주님이 앉으신 것은 분명히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인의 뜰로부터 시작되는 성전 출입구에는 당시 13개의 나팔 모양을 갖고 있는 헌금함이 놓여 있었는데 13개 중에 2개는 성전세를 내는 헌금궤였고, 또 다른 6개는 자유헌금을 내는 궤였으며, 그리고 나머지 7개는 다른 지목 헌금궤였는데 바로 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주님이 미문에 앉으신 의도였습니다. 전 이해로 당시 헌금궤는 모두 놋쇠로 만들었습니다.
본문 41절에서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에서 중요하게 여겨할 단어가 바로‘보실새’입니다. 헬라어 성경에 이 단어는‘데오레오’는 그냥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데오레오’는 시제가 미완료시제입니다. 이 말은 한 번만 보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목적한 의도가 달성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자세히 보아서 이해할 정도가 될 수 있도록 뚫어지게 계속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계속해서 뚫어지게 헌금하는 것을 보신 이유는 헤롯 성전에서 헌금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41절 후반절에서 42절에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데오레오’한 결과, 두 가지의 현상이 있었습니다. ① 부자들은 많이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② 반면 가난한 괴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음을 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일 먼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화폐 중에 지폐는 없었고 사회적으로 상용하는 화폐는 동전이었습니다. 렙돈은 유대의 동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의 동전입니다. 이 두 가지의 화폐를 마가가 소개한 이유는 마가복음이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화폐를 데나리온과 비교하여 설명을 드린다면 1 렙돈은 1/128 데나리온입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의 액수가 두 렙돈이니까 1/64 데나리온이 됩니다.
성전에 들어온 부자들은 놋쇠로 되어 있는 헌금궤에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당시 금 1달란트의 무게가 32kg 정도가 된다는 것을 전제할 때 그들이 넣은 많은 돈들은 놋으로 만든 헌금궤에 소리가 크게 울리는 청각적인 효과가 있는 달란트, 므나, 세겔, 데나리온 같은 화폐 가치가 높은 동전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에 반해 과부는 직경이 1cm도 안 되는 아주 조그마한 볼품이 없는 동전인 약 10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 두 렙돈을 드린 것입니다. 두 렙돈을 떨어뜨릴 때에는 놋쇠 헌금궤에 소리가 날 리가 만무입니다. 주님이‘데오레오’하신 헌금의 행위에 대하여 이미 부자와 과부의 헌금 행위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미 게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43-44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주님의 선포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과부가 제일 많은 헌금을 드렸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일부를 헌금한 것이지만 과부는 가난한 중에 그녀가 드릴 수 있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선언하신 주님의 촌철살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미션입니다.
1. 하나님은 절대로 돈을 받지 않으신다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들의 헌금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풍족한 중에 헌금을 냈다고 말하셨습니다. 풍족한 중에 헌금을 냈다는 말에 대해 독일 신학자 요하킴 그닐카는 “소유에 대한 내적인 자유함 때문에 헌금하는 것은 가치 있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풀어서 설명을 드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 너무 많아서 그 많은 물질을 자기만족을 위해 자선 사업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내는 행위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돈을 받들 헌(獻) 금전 금(金)이라고 해서 받들어 드리는 금전, 즉 헌금이라고 표현합니다. 물질을 받들어 드리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이외는 없습니다.
AD 1C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본문의 부자들을 “성전에서 이 막대한 양의 헌물을 한 자들 중 다수는 예루살렘이나 그 근방에 살았던 지주들이었고,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방문한 디아스포라 사업가들과 상인들이었다.”와 같이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고 안병무 박사가 쓴‘마가복음에 본 역사의 주체’라는 책에서 “예수께서 지극히 관심을 가졌던 갈릴리는 오랜 동안 이방인들이 점유하고 있어서 이방인의 땅으로 명명되었고 이 땅은 그 이방인들과 로마의 통치 권력과 지방 관리들과 왕족들에 의해 강탈당하여 갈릴리 백성들은 그 땅을 소작하여 먹고 살아야 하는 가난을 겪어야 했고 각 종 세금으로 인한 이중고를 당해야 했다.”라고 갈파했습니다. 당시의 성전에서 많은 돈을 냈던 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놋쇠 헌금궤에 동전을 넣을 때 가장 큰 소리가 나도록 동전을 떨어뜨린 자들이 바로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잘 들리도록 헌금궤에 자신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물질의 일부를 자기만족의 일환으로 헌금궤에 돈을 떨어뜨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주님은 이들에 대하여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그들이 보상 심리와 자기만족을 위해 낸 돈이었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받지 않으십니다. 돈을 하나님께 내면 생돈을 날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나의 전부가 포함된 헌금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2. 나의 전부가 포함된 헌금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본문 44절에서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데오레오’하신 결과 눈 여겨 보신 것이 있었습니다.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과부가 드린 물질의 액수는 두 렙돈, 1/64 데나리온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6원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물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 과부가 앞에서 언급한 부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헌금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본문 그대로 직역하여 설명하면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그녀의 전 생활비였기 때문에 최고의 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과부를 “그녀는 가난한 가운데 그녀의 생활지 전부를 드렸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전부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는 ① “전부를 드리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억지예요.”라고 말하는 분은 단언하건데 부분도 드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과 ② 강력하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물질의 전부이기보다는 그 정신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십일조 액수가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일천번제의 횟수와 금액이 아니라 일천번제의 정신입니다. 감사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감사의 정신입니다. 건축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건축헌금의 정신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일체의 드림은 정신이 포함되어 있을 때만이 헌금이라고 믿는 자존심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종류와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아니라 헌금을 드린다는 것을 전제할 때는 반드시 삽입되어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헌금을 드릴 때 그 헌금과 더불어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고 교회에 내는 돈은 그냥 부자들이 자랑하고 싶은 돈 자랑이요 보상심리이며 자기만족이자 결코 헌금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전부가 포함된 헌금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모든 세인의 지체들은 나를 자랑하기 위한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포함한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