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3. 01. 13 셀 사역2024-04-22 11:4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특새 기간 동안 은혜가 되었던 말씀 피드백하기와 에피소드나누기. 참여 못한 자들은 다음 사역 독려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복음성가)
● 내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이사야 6:6-13
● 제목 : 보내소서, 보내주소서.(2)
1) 1) 이사야가 소명을 받았을 때의 역사적인 배경을 함께 나누어 보십시다.
● 설교를 중심으로  

2) 이사야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제2의 신탁 내용과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 본문 9-10절을 중심하여 설명하고 주일 설교의 핵심을 기억하여 되새김질 합시다.  

3) 우리들이 제천 열방의 120,000 아담에게 나아가야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은 자 사상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십시다.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1. 2013년 세인교회가 표어대로 승리하고 부흥하게 하옵소서.
 2. 2월 24일(주일) - 27일(수)까지 실시될 춘계 말씀 축제의 강사의 예비하심과 온 교우들의 영적 무장을
    위한 사전적 은혜와 승리를 주옵소서.
 3. 2013년 피선교지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1) 7개의 해외 피선교지의 승리와 선교사님들의 건강을 위하여
  2) 3개의 기관 선교의 지속적인 부흥을 위하여
  3) 9개의 국내선교 교회와 섬기는 목회자들의 가정의 승리를 위하여
 4. 하나님 교회에서 진행되는 두 날개 사역이 2013년 더 아름답게 하옵소서. 5. 긍정의 일군을 보내주시고 긍정의 일군이 양육되어 파송되게 하옵소서.
 6. 2015년의 비전 공유가 우리 모두 지체들의 비전이 되게 하옵소서.
 7. 담임목사와 열방 제천을 변화시킬 영적인 뵈뵈,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많아지게 하옵소서.
 8. 한국교회의 교회다움과 하나님의 지속적인 간섭이 임하여 세속적 권세를 초토화시키게 하옵소서.
 9. 성령과 말씀이 균형 있게 함께 움직이는 우리 교회 되게 하옵소서.10.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인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설교요약 (SUMMARY)
2013년 1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6:6-13 / 제목: 보내소서, 보내주소서.(2)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하는 그 지존자이신 하나님에게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신뢰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적어도 신앙인이 이 정도의 quality 를 갖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인의 자리에 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세속적인 눈과 가치로 바라보면 어처구니없이 바보 같은 역설까지도 진리임을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산상수훈의 백미인 팔복 가운데 두 번째 복은 마태복음 5: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말씀합니다. 이 두 번째의 복을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책‘산상수훈’에서 “불행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로 번역했습니다. 팔복 중 2번째 복의 역설은 영적 자존감을 상실할 때 느끼는 슬픔입니다. 하나님을 아름답게 섬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나의 연약함 때문에 울고 통곡하는 이들, 바로 이들이 복된 자라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8복의 두 번째 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정도를 요구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달려가는 자들이 복이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공동체의 이익과 나눔을 도외시하고 내 가족, 내 식구만을 위한 삶을 사는 자들은 신앙 공동체 속에서 부대낄 때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식만의 안위만을 보고 달리는 자들은 함석헌 선생이 노래했던“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의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없습니다. 또한 개인의 행복만을 위해 하나님과 저울질 하며 시소게임을 하고 있는 자들은 니느웨 성에 존재하는 120,000명의 아담들과 가축들을 아끼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사야가 말한‘나를 보내소서’의 절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믿음의 quality 는 바로 이 정도의 수준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싫든 좋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사야의 수준까지 성장해야 하고 또 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걸 맞는 도전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말한‘나를 보내소서.’를 통해 말하는 영적 수준은 바로  * 내가‘남은 자’라는 분명한 믿음의 수준입니다.
웃시야가 죽던 해, 남 유다의 멸망이 짙게 드리운 바로 그 때 아무도 나서지 않는 깜깜한 절망의 시대,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데 일군이 필요한 바로 그 암담한 시대에 이사야가 일어선 것입니다. 본문에서 일어난 이사야가‘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 이 고백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감동을 주는 고백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해에 나라의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함을 경험한 이사야는 곧바로 자신의 더러운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극단의 현존을 경험한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 사함에 대한 분명한 인치심입니다. 본문 6-7절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말씀합니다. 이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한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두 번째의 미션을 부여 받게 되었습니다. 이미 왕실 예언자로 첫 번째의 미션을 부여 받고 사역을 하고 있었던 이사야는 이런 계획된 정치적인 영역에서 사역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예언자적인 사명에 위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갈등의 연속선상에서 유다의 정치적인 지주였던 웃시야 왕까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사야는 유다라는 지역과 동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영적인 긴장감들로 인하여 두려워질 정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에게 엄습한 영적인 부담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위기의 고통을 이사야는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 극복하고 두 번째의 미션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나를 위해 갈꼬? 하시는 질문에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저하지 않고 즉답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그럴듯한 소명 장면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소명 장면은 매우 부담스럽고 살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에 반응한 이사야에게 두 번째의 미션을 주셨습니다. 본문 9-10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명령하신 두 번째의 미션은 ‘① 가라 ② 외쳐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탁의 말씀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신탁이었습니다.‘ ① 너는 가서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라 ② 그들의 귀를 막히게 하라 ③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 ④ 그들이 보고, 듣고 해서 마음이 깨달아 돌아와 치유 받지 못하게 하라’였습니다. 이사야가 받은 신탁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절대로 죄를 깨달아서 회개하거나 돌이키는 일이 없도록 예언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받은 하나님과의 신탁의 대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이 황당한 신탁을 받고 참담해 하며 11절 전반절에 “주님, 어느 때까지 입니까?”묻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하지 못하게 하여 심판을 받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자조 섞인 호소를 이사야는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지부동하십니다. 이사야의 질문에 단호하게 답을 주십니다. 11-12절에서 이 땅, 유다가 황폐해 질 때까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13절에서 당신이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유다를 벌하시려는 의도를 이사야에게 설명하십니다. 마지막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말씀합니다. 아하스의 학정과 하나님을 떠난 영적 패륜의 때에 하나님의 심판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다 나라의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예언 성취는 주전 734년에 발생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으로 성취됩니다. 예루살렘만은 멸망을 당하지 않았지만 외국 군대인 시리아와 베가가 이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연합 군대에 의해 침공을 받은 남 유다는 심각한 타격을 받으며 고통을 당했고 왕자들은 그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에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고 그루터기들만 남게 되는 예언의 성취를 역사는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가 완전히 멸망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를 멸망시키심에 있어서 약속하신 10/1의 남은 그루터기들로 구속사의 맥을 이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예언의 신탁을 전하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사는 남은 자들로 이루시겠다는 메시지 때문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남은 자들은 신약 시대로 넘어가면서 교회 공동체에 남아 있는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받은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오늘 세인 신앙 공동체에서 구원의 감격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역하는 우리 모두가 남은 자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신학적인 선언들을 신약 성경 곳곳에서 전해 줍니다.
로마서 11:5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는 로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의 남은 자는 세인 교회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신실한 지체들이며, 우리들이 이사야가 천명한 그루터기요 거룩한 씨요 남은 자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남은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또 그들에게 보내졌습니다. 남은 자는 예수의 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 설교의 가장 클라이맥스적인 도전은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도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또 다른 남은 자들을 만들어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이 바로 우리들에게 있음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남은 자로 만드신 이유는 세상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생명을 소개함으로 또 다른 남은 자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2013년 우리 교회 표어의 앞부분인‘보내소서’의 이유입니다. 지난 주간 제 3차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찾은 은혜는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주어진 본문인 요나서 4:11절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이 때‘명’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아담’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은 사람을 말합니다. 약 140,000명의 제천 인구 가운데 120,000명은 예수를 믿지 않는 아담들입니다. 이 120,000명의 아담은 하나님이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에게 구원하라고 위임해 주신 두 번째의 미션입니다. 우리는 그 120,000명을 향하여 보냄을 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나를 보내소서. 120,000명의 아담들에게’가 2013년 우리 모든 세인지체의 슬로건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