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가복음 146번째 강해)제목: 남과 자기 / 본문: 마가복음 15:24-32 미국의 여성 경제학자인 메이벨 뉴 커머(Mabel Newcomer)는 “문제는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가는 그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을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면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라는 교훈일 것입니다. 주님 또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과정을 중요시 여기며 사셨습니다. 그 어느 한 순간도, 죽음의 순간마저도 결과를 위해 사신 적이 없습니다. 과정을 중요시 여겼던 주님의 죽음의 순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짊어진 십자가 때문에 간신히 골고다로 불리는 해골의 골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주님이 달린 십자가의 종목(縱木)과 강도라고 지칭되고 있지만 실상은 로마의 권력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된 이스라엘 쪽으로 보면 영웅 두 명이 달릴 종목(縱木)까지 도합 세 개로 추측되는 십자가 나무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골고다에 도착하신 뒤에 다른 강도들과 함께 브라이도리온에서부터 가지고 온 그리고 중간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올라온 횡목에 뉘어져 양손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그런 뒤 종목에 십자 형태로 달리신 뒤 이제는 발목에 못까지 박히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 쓰신 가시 면류관 그 위로 죄 패가 쓰여 있었는데‘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같이 십자기에 달린 강도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명은 좌편에 또 한 명은 우편에 달렸습니다. 이 때의 시간은 제 삼시(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오전 9시)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음을 마가는 증언합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갖는 장면을 묘사한 것은 구약성경의 성취를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심각한 핍박 중에 쓴 시편 22편의 내용은 마치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탄원시인데 특히 주님의 옷이 제비뽑힌 것에 대한 기사는 시편 22:18절 예언의 분명한 성취입니다. 시편 22:18절에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말씀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성취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쓰라린 압권은 29-32절입니다. 이상의 구절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 동일하게 반응한 사람들의 부류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① 제일 먼저 지나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보인 반응은 본문 29-30절에서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말씀합니다. 주님은 공개된 처형 장소인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장소를 스쳐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나가면서 이구동성으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머리를 흔들었다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행위였습니다. 고난 주간의 둘째 날 주님께서 소위 성전정화의 사역을 통해 당시 주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들의 굴혈로 만들지 말하는 선포를 하신 뒤에 그 유명한 요한복음 2: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이 선언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때 당한 충격을 그들은 종교적 모욕이라고 이를 갈았을 것이며 오늘이 바로 그 모욕에 대한 되갚음을 주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그들은 가장 강력한 부정의 표현으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성전을 부수고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큰 소리를 친 저 예수를 향하여 그들은 아주 가소로운 듯이 이렇게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나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만 보면 단순히 이렇게 주님에게 모욕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비웃음은 실상은 아주 철저하게 역시 구약성경 시편 22편의 완벽한 성취의 증거입니다. 시편 22:7절은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예언합니다. ② 두 번째의 부류는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모든 역량을 쏟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의 반응은 본문 31절에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증언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과 매일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함정에 빠져 힘없이 죽어가던 예수를 보고 통쾌해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본문 31절과 32절 전반절에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비아냥됩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세속적인 잣대로 물리적인 충격에 전혀 방어하고 있지 못한 예수님에 대하여 더 확신에 찬 어조로 십자가에서 내려올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은 사탄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에 하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경우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하는 데에는 성공하는 것이었지만 인류를 구원하는 것에는 실패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의 성서신학자인 요아킴 그닐카는 자신의 마가복음 주석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본인을 십자가에 다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적절합니다. 주님은 인간들에게 치욕과 수모를 당하고 있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는 응원과 격려를 십자가상에서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간에게 버림을 받아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지혜를 선택했다는 탁월한 해석입니다. ③ 한 부류만 더 보면 본문 32절 마지막 절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부류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입니다. 마가는 오늘 본문을 마감하는 마가복음 15:32절 하반절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분명히 이렇게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유대 열혈 애국자들 역시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는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지금 강도들 자신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데 동참합니다. 물론 누가복음 23:39-43절에 기록된 누가의 병행 복음서에는 한 명의 강도가 회개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린 시간과 운명하실 때의 시간이 오후 3시로 추측되는 바 그 6시간의 여정 중에 한 명의 강도가 회심했을 것이라고 보는 많은 복음주의권의 학자들의 분석입니다. 분명한 것은 강도들 역시 초기 내러티브에 의하면 주님을 공격했음을 보여줍니다. 마가가 전한 이상의 보고가 주는 도전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은 철저하게 고독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그의 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단의 상황에서도 주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31절에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말씀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엄청난 고통의 터널 속에서도 결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시고 그 고통을 감내하신 이유는 바로 남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갖고 다시 표현하면 “인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적대자들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마스터플랜이 완성됨을 아시고 그 과정에 최선을 다하셨기에 우리는 결론적으로 구원받음이라는 해피엔딩의 은혜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종교철학자였던 마틴 부버의 'Ich und Du'(나와 너)에서 “엄격한 의미에서의‘나’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는‘나’는‘나’와‘너’사이에 존재하는‘나’이며,‘나’와‘그것’사이에서 발견되는‘나’이다.”말합니다. 주님은 홀로 거룩하신 분이시며 당신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존자이십니다. 그런데 홀로 존재하셔도 전혀 문제가 없는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홀로 계시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나’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에게서 행복을 찾으셨습니다. 부버의 말로 적용한다면 예수께서는‘예수와 너’,‘예수와 우리’를 통해 당신의 행복을 느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구원하지 않았다는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머리 흔듦의 치욕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강도들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주석을 통해 2012년 마지막 송년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이 아닌 남에게 집중하는 삶임을 새기십시다. 마태복음 11:28-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말씀합니다. 내 짐을 짊어지고 버겁고 힘이 든데 너희들이 들고 있는 모든 짐을 나에게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행하신 사역 가운데 누가복음 6:30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말씀합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빼앗고 짓밟고 짓이겨서 그 위에 서는 것이 이 세상 논리인데 그런데 그 반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데 진짜로 사신 분이 계십니다. 오늘 수모와 수치의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죽은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사셨던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마태복음 10:42절과 7:1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남은 구원하셨고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는 비아냥에서도 굴하지 않고 십자가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만을 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나와 너’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나와 그들’ 사이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세인교회 지체들의 삶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이 아닌 남에게 집중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