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2. 12. 23 셀 사역2024-04-22 11:4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나에게서 무언가를 떼내기 위해 노력했던 에피소드 나누기(예. 동생, 껌, 이-벌레... 등등)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찬 430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마가복음 15:21-23
● 제목 : 억지로라도
1)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된 상황을 설교를 중심으로 말해 봅시다.
● 주일 설교를 상기하며
  

2) 구레네 사람이 시몬이 억지로 짊어진 형틀이었지만 그에게 임한 은혜는 무엇이었으며, 그를 통해 얻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 로마서 16:13, 본문 21절 참고
  

3) 구레네 사람 시몬, 엘리사,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신앙고백을 내 삶에 적용하고 나누어 봅시다.
‘우리들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하는 진정한 자랑거리이기 때문입니다.’-설교의 원고 중에서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하기 : 주간 교회 공통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기.

① 행복 나눔 축제를 통하여 결신된 지체들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양육자의 삶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새가족반 사역과 섬김이 승리할 수 있도록)
② 제 5회 사무총회의 승리를 위해서 (2013년 1월 6일 주일)
④ 성탄의 계절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⑤ 2013년도 소그룹 사역의 역동적인 조정과 순종적인 사역을 위해
⑥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세인 비전을 갖고 함께 달려갈 긍정적인 일꾼을 보내주옵소서.
⑦ 담임목사와 같은 마음,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역자를 보내 주옵소서.
⑧ 제천 열방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자존감을 세우고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긍정적 동역자를 보내 주옵소서.
⑨ 성령님을 춤추시는 성령의 임재가 한 주간 교회와 세인 지체들의 가정에 충만하도록 인도 하옵소서.
⑩ 제 2세대 사역을 위하여
⑪ 153비전의 승리를 위하여
⑫ 2013년 1월 7일~12일에 있을  특별새벽기도회를 위해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설교요약 (SUMMARY)
2012년 12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가복음 145번째 강해)
제목: 억지로라도 / 본문: 마가복음 15:21-23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심각한 모욕과 린치를 로마의 군인들에게 당한 뒤에 이제는 브라이도리온에서 골고다라고 하는 곳으로 끌려가십니다. 마가복음 15:20절에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말씀합니다. 여기에 기록된‘끌고 나가니라’는 헬라어‘ 엑쌀고’는 신약성경에서 딱 한 번 기록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짐을 옮길 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브라이도리온에서 엄청난 린치를 당하신 주님을 로마의 군인들은 짐짝 다루듯이 질질 끌고 골고다로 이동했음을 암시해 주는 단어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들이 주목할 것은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짐짝 끌 듯이 끌고 나갔던 이유는 이미 예수님의 육체는 십자가라는 형틀을 끌고 갈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골고다는 구 예루살렘 북서쪽에 솟아 있는 곳입니다. 경사가 있는 동산입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길을 당신이 달릴 십자가형틀을 지고는 도무지 올라갈 수 있는 체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형틀은 말 그대로 십자가의 형을 갖춘 나무 모양이 아닙니다. 주님이 짊어져야하는 형틀은 일자형 횡목이었습니다. 이미 십자가 기둥은 처형 장소에 새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횡목의 나무를 져야 했는데 주님은 그것을 질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셨습니다. 상태의 심각성을 안 로마의 군인들은 도저히 예수께서 골고다까지는 올라갈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대안을 찾아냈습니다. 본문 21절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말씀합니다. 때마침 그 십자가의 길에 북아프리카의 유명한 도시였던 키레네(구레네)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시몬에게 로마의 군인들은 주님 대신 일자 십자가형틀을 짊어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졸지에 구레네 사람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억지로’시몬은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억지로’로 번역된 헬라어‘앙가류오’는‘강제로 징발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거센 물살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고목나무같이 그렇게 쓸려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억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십자가를 지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역사의 엄청난 한 획을 긋는 무대의 정 중앙 서게 되었습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재수가 없는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시몬이 억지로 짊어지게 된 십자가로 인해 얻게 된 또 다른 얼떨결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로마 군인들의 강압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할 수없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을 끌고 가는 그 현장인 골고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위‘비아 돌로로사’라고 하는 수난의 길을 올라가면서 인생 일대의 엄청난 일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현장에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같이 올라가는 주님의 고난에 몸소 동참하면서 아파하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하여 거의 사망 직전의 고통에 있었던 주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23:28절을 시몬은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28절에서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말씀합니다. 시몬은 아마도 망치에 머리를 맞은 것과도 같은 충격으로 골고다에 도착해서 십자가를 내려놓은 뒤에도 그는 곧바로 그 자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 일어나는 주님의 십자가 행적을 현장에서 목도했을 때 또 다른 충격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골고다에 같이 못 박힌 강도 중 한명이 주님을 비난하고 공격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누가복음 23:34절 전반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외치셨는데 바로 그 음성을 시몬은 들은 것입니다. 아마도 시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이 외침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도무지 이성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정신적인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구레네에서 예루살렘까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올 정도의 유대종교적인 심성을 갖고 있었던 자가 시몬이라는 전제를 가질 때 예수님의 이 선언은 그를 영적으로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을 주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는 자연적인 역사가 구시까지 임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주님의 십자가 동선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중요한 포인트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경험한 결과 그는 훗날 예수의 제자로 변화되어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 주인공임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6:13절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말씀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연대는 AD 56경으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도와 사역해 주었던 동역자들을 소개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로마서 16장에서 분명히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인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말씀하며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노출합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니라”에서 루포의 아버지이며 바울이 나의 어머니라고 말했던 여인의 남편은 오늘 본문에서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로마서에 나오는 루포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루포와 동명이인이었을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AD 1세기 중반의 고대에서 특별히 구레네 지방과도 같은 이방의 지역에서 아주 드물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중에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은 너무 심한 반대를 위한 반대일 것입니다.
본문의 구레네 사람 시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동선을 보면서 영적인 회심을 이루었고 그의 신앙적인 영향력은 그의 자식 대에 바울 사도를 도와 복음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위대한 가문으로 재탄생될 수 있었던 주인공입니다. 또 하나, 구레네 사람 시몬이 훗날 예수님의 신앙공동체로 돌아왔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증거는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이 일이 일어난 후 약 40년 정도가 지나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복음서에 삽입했다는 점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름들은 저자들이 구속사의 행전 속에 반드시 필요하기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 역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된 제자군의 한 사람으로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서학적인 해석과 신학적인 해석을 토대로 우리 세인지체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능동적이 아니고 수동적이라도 십자가의 동선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그 능력을 부여해 주는 공동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의 능력에 붙어 있는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그 십자가의 능력대로 사는 자들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주전 9세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아주 활동적인 능력과 사역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신탁을 전한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가 맨 처음부터 그렇게 능력을 행하던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능력의 시발점은 열왕기하 2장에서 시작됩니다. 잘 아는 것처럼 엘리야는 그의 리더십을 엘리사에게 인계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리더십을 인계할 때의 상황을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장소를 이동하여 피할 때마다 끝까지 추적하여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리야가 나를 쫒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열왕기하 2:6절에서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붙어 있는 자의 철칙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사를 보면 마가복음 7:28절에서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말하며 기막힌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여인은 죽어도 못 간다는 말입니다. 죽어도 못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못 하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녕 그 능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있게 발휘하는 동역자에게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레네 시몬에게서 배우는 은혜요 도전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고전인 토마스 아켐피스가 쓴‘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의 하늘 왕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말합니다. 이것은 아켐피스의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도 이하 동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이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익숙하지 않더라도 그 십자가에 붙어 있겠다고 호의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신앙생활을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쾌락의 축면에서 잘 되는 것은 자랑할 거리가 아니라 못난 일이지 복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하는 진정한 자랑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백했던 것입니다. 바울처럼 갈라디아서 6:14절과 같은 고백을 드리는 세인의 지체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