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2. 12. 16 셀 사역2024-04-22 11:4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무릎 꿇어 본 에피소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님이 주신 땅으로 (복음송가)
● 날 대속하신 예수께 (찬송가 321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마가복음 15:16-20
● 제목 : 꿇어 절하더라

1) 본문 18-19절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행한 그들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 ‘절하더라’의 본래의 뜻
  

2)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갈렙의 인생을 통해 통찰케 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 민수기 32:12, 역대상 2:18-20
  

3) 오늘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여 지금 나의 믿음의 거점을 점검하고 나누어 봅시다.
“나는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거듭 확인하곤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믿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 중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하기 : 주간 교회 공통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기.
① 행복 나눔 축제를 통하여 결신된 지체들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양육자의 삶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번 주간부터 진행되는 4주 새 가족반 사역과 섬김이 승리할 수 있도록)
② 12월에 진행되는 각 기관 총회가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③ 제 5회 사무총회의 승리를 위해서 (2013년 1월 6일 주일)
④ 성탄의 계절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⑤ 2013년도 소그룹 사역의 역동적인 조정과 순종적인 사역을 위해
⑥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세인 비전을 갖고 함께 달려갈 긍정적인 일꾼을 보내주옵소서.
⑦ 담임목사와 같은 마음,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역자를 보내 주옵소서.
⑧ 제천 열방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자존감을 세우고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긍정적 동역자를 보내 주옵소서.
⑨ 성령님을 춤추시는 성령의 임재가 한 주간 교회와 세인 지체들의 가정에 충만하도록 인도 하옵소서.
⑩ 제 2세대 사역을 위하여
⑪ 153비전의 승리를 위하여
⑫ 2015년에 헌당을 할 수 있는 부흥을 주옵소서.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설교요약 (SUMMARY)
2012년 12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가복음 144번째 강해)제목: 꿇어 절하더라 / 본문: 마가복음 15:16-20
신앙의 선배들 중 드와이트 무디와 디트리히트 본회퍼 목사의 공통점은 철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본인들에게 승화시켰고 주님을 목적하면서 주님을 통한 영광에 초점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포인트를 두었던 자들이기에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종말론적인 소망으로 그들의 삶을 좌고우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로마서 8:17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위렌 위어스비 목사가 말한 것처럼 'bleeding' 이 없이는 결코 'blessing' 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최고의 가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난 뒤에 가장 폭력적인 유대에 파송된 로마의 정예 부대원들에게 넘겨졌습니다. 동시에 치외법권의 장소였던 브라이도리온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육체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육체의 고문은 당하면 당할수록 사람을 더욱 강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초대 교부인 크리소스톰이 황제에게 핍박을 받는 강도가 투옥, 굶주리게 함, 때림, 죽임 등으로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처럼 인간의 육체적인 린치는 인간을 굴복하게 할 수 없는 강인함을 주곤 합니다. 아마도 주님이 로마의 군병들에게 당한 이런 육체적인 린치와 수모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주님에게 임한 핍박의 절정은 본문 18-19절입니다.“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로마의 군인들은 그렇게 육체적인 린치를 가한 뒤에 왕의 옷을 억지로 입으신 주님에게 엎드려 절을 하는 퍼포먼스를 가한 대목입니다. ‘절하더라’라고 번역된 헬라어‘프로세퀴눈’은 통상적으로 엎드려 예배하는 것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이지만 어원적인 본래의 뜻은‘개가 주인의 손을 핥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로마 군인들의 행위가 주님에게는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수치가 되는 이유는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드리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절함이 아니라 깔봄의 절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깔 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을 업신여겼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업신여긴 자들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의 영적인 교훈을 통해 얻는 은혜는, * 주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흉내 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공격적으로 선포하면 주님을 믿는 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흉내 내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로마 군인들을 빗대어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께 왕의 옷을 입힌 자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본문 18절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께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도 합니다. 꿇어 절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주일에 나와 어김없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 금식, 작정기도, 봉사, 구제, 어디를 보나 손색이 없는 그리스도인처럼 종교적인 모든 의무를 행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분명히 이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주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자들이 한국교회에 비일비재합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신앙적인 색채는 내가 당신을 위해서 이 만큼 했으니 당신도 나를 위해서 이만큼을 해주어야 한다고 마땅히 요구하는 특징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내가 만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의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믿음의 정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임을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역사의 정면 무대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없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셨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갈렙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갈렙에 대한 정보는 ① 가나안을 정탐하고 오라는 모세의 명령을 받고 정탐하고 돌아온 이후 긍정의 보고를 여호수아와 함께 하여 가나안에 들어갔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② 이후 역사의 정 무대에 올라선 여호수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진 것처럼 보이는 2인자입니다. ③ 그렇게 살았지만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는데 있어서 45년 만에 다시 무대로 올라서서 믿음을 갖고 사람들이 가기를 싫어했던 척박한 땅이었던 헤브론을 점령하였던 일등공신입니다.
갈렙의 가장 결정적인 축복의 한 단면으로 제일 먼저 민수기 32:12절에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말씀합니다. 갈렙의 출신 성분은 그나스 출신이었습니다. 그나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정체를 창세기 36:9-11절이 답해 주고 있습니다.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갈렙의 출신 성분이었던 그나스는 에서의 후손이었다는 정보입니다. 우리들이 갈렙 정도라면 시쳇말로 성골 출신인 야곱의 후손일 것이라는 추측을 완전히 뒤집어 업는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렇게 소외된 비주류 족보 출신의 갈렙을 추적하다보면 정말로 기막힌 은혜를 발견합니다.
역대상 2:18-20절에 “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그의 아내 아수바와 여리옷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낳은 아들들은 예셀과 소밥과 아르돈이며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들었더니 에브랏이 그에게 훌을 낳아 주었고 훌은 우리를 낳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말씀합니다. 갈렙이 에브랏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아들이 훌이었습니다. 훌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다고 역대상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면 갈렙의 아들은 훌이었습니다. 갈렙의 손자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갈렙의 증손자가 브살렐이었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야곱의 계보가 아니라 그 야곱에게서 밀려난 에서의 불행한 족보 출신입니다. 이 말은 축복의 계통에서 밀려났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1:2-5절을 보면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말씀합니다. 분명히 출애굽기에서 그나스 출신의 에서의 족보에 있어야 하는 훌과 그의 아들이 유다 지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갈렙의 증손자인 브살렐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스라엘의 성막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이 앞서 말한 하나님의 복을 따라 살았고 이인자로 물러서서 역사의 무대 뒤에 있었지만 그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상응하는 복을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부모의 바른 신앙생활이 자녀들에게 복으로 남겨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잘못하면 아주 무서운 맹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부모의 올바른 신앙의 삶을 통해 자녀가 승리한다는 것만 인정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해석은 잘못하면 부모의 행위적인 신앙이 우선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과 은혜를 빈곤하게 하는 위험성이 농후합니다. 갈렙이 잘 살았기 때문에 자녀, 손들이 복을 받았다는 해석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더 큰 은혜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렙의 후손들이었던 훌과 브살렐에게 유다 지파의 복된 족보로 병합시켜주신 것은 갈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 고유의 전적인 은혜임을 먼저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만에 하나 갈렙의 선행적인 신앙 때문에 자녀들이 잘 되었다고 믿는 신앙만을 고수할 때는 자녀들이 반드시 잘 되어야 하는 것이 법이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만 자녀들은 그 반대로 얼마든지 세상의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내가 세워둔 나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믿는 흉내만 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든 모습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지 않을 때 우리들은 얼마든지 예수님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 그에게 왕이라고 고백하고 절을 하면서도 나의 내면의 깊은 신앙의 한 복판에서는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예수님을 때리고 침 뱉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들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침체나 기쁨이 없고 영적인 만족이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달라스 윌라드 박사는 자신의 책‘하나님의 모략’에서 “나는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거듭 확인하곤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믿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흉내 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신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믿는 척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이라는 정말로 귀중한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세인 지체들 중에는 믿는 척 하거나 믿는 흉내만 내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야겠습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께 포장하여 절하고 엎드리지 말고, 내가 만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동일시하면서 포장하여 꿇어 절하지 마십시다. 그것은 흉내요 척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맞추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께 진정으로 무릎 꿇어 절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