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2. 12. 9 셀 사역2024-04-22 11:4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이번에 당선되는 대통령에게 바라고 싶은 것 두 가지씩 말해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그가 찔림은 우리의 (복음성가) 
● 얼마나 아프셨나 (찬송가 614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마가복음 15:16-20
● 제목 : 끌고
1) 주님께서 브라이도리온으로 끌려가서 로마의 군인들에게 당하신 수모 6가지를 말해보자.
● 본문 17-19절을 자세히 읽으세요.
  

2) 주님이 수치를 주고 있는 자들에게 수동적으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 오늘 설교의 테마를 중심으로 말해보십시다.
  

3) 대강절 두 번째 주간을 보내면서 우레 세인지체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몸가짐은 무엇인가?
오늘 설교의 결론적인 교훈을 토대로 함께 나누는 은혜를 가져봅시다.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하기 : 주간 교회 공통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기.

① 행복 나눔 축제를 통하여 결신된 지체들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양육자의 삶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번 주간부터 진행되는 4주 새 가족반 사역과 섬김이 승리할 수 있도록)
② 12월에 진행되는 각 기관 총회가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③ 제 5회 사무총회의 승리를 위해서 (2013년 1월 6일 주일)
④ 성탄의 계절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⑤ 2013년도 소그룹 사역의 역동적인 조정과 순종적인 사역을 위해
⑥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세인 비전을 갖고 함께 달려갈 긍정적인 일꾼을 보내주옵소서.
⑦ 담임목사와 같은 마음,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역자를 보내 주옵소서.
⑧ 제천 열방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자존감을 세우고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긍정적 동역자를 보내 주옵소서.
⑨ 성령님을 춤추시는 성령의 임재가 한 주간 교회와 세인 지체들의 가정에 충만하도록 인도 하옵소서.
⑩ 제 2세대 사역을 위하여
⑪ 153비전의 승리를 위하여
⑫ 2015년에 헌당을 할 수 있는 부흥을 주옵소서.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설교요약 (SUMMARY)
2012년 12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가복음 143번째 강해)제목: 끌고 / 본문: 마가복음 15:16-20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세상 권력은 최고점을 향하여 올라가는 지향점을 목표로 두고 있으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십을 소유하신 예수님은 세속적 가치의 리더십과는 전혀 반대 개념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여론에 굴복하여 빌라도가 바라바를 석방하는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언도가 난 직후의 기사입니다. 예수에 대한 십자가형이 떨어지자 이제 주님의 신병은 로마의 군인들에게 인도되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수하의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로 데리고 갑니다. ‘브라이도리온’은 총독의 관저를 말하는 라틴어 'Praetorium'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간 곳은 지배 계층이 피지배 계층을 물리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문할 수 있는 치외 법권적인 장소였습니다.
본문 16절의‘온 군대를 모았다’는 기록에서‘군대’를 의미하는 헬라어‘speiran’(스페이란)은 로마 군대 조직 중에 적게는 200명 많게는 600명으로 이루어진 보병 중대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 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보병이 겹겹이 예수님의 십자가형 집행에 동원되었는데 그 이유는 혹시나 모를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에 따라 반란이나 소요에 대비하는 포석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삼엄한 경계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형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 17-19절입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힌 것은 왕의 옷을 입었음을 비아냥거리기 위함이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운 것 역시 힘없이 죽어야 하는 왕을 상징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렇게 외형적인 왕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만든 뒤에 유대인의 왕이여! 라고 외치며 주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 뒤, 그들은 최고의 악질적인 수치를 주기 위해 주님의 머리를 때리고 그 분에게 침을 뱉고 그에게 엎드려 절을 한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께 저지른 6가지의 행위를 유진 피터슨의‘메시지’의 해석을 보면 “실컷 즐기고 난 뒤 그들은 예수의 자주색 망토를 다시 벗기고 그 분의 옷을 다시 입혔다. 그런 다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로마의 군인들은 도무지 인간이라면 행할 수 없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본문이 고발합니다. 자기들의 죄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능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렇게 실컷 그들은 즐겼습니다. 이 정도라면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으신 주님이라도 이 정도의 조롱과 희롱과 비아냥이라면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인성을 갖고 계셨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적어도 이 정도의 수모라면 주님이 가지고 계신 전능성을 발휘해서 일거에 이 수모를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함께 나누셨던 예수님의 어록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주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교적 용역 깡패들을 마주한 베드로가 주님을 체포하려던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며 대항한 사건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이 마태복음 26:52-53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주님은 이런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지금 200-600명 사이의 로마 보병 중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12군단이 더 되는 하나님의 천사 군단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구절 중에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단어가 16절의‘끌고’와 20절의‘끌고’입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앞의 단어는‘aphgagon’(아페가곤)의 번역이고, 뒤의‘끌고’는‘exedusan’(엑쎄두산)의 번역입니다. 이 두 동사는 모두가 시제가 능동태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군인들은 주님의 육체를 그렇게 강압적으로 물리력을 동원하여 끌고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동사의 대상이신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히 수동태의 입장에서 당하신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두 번에 걸쳐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으시고 개 끌리듯 끌려 다니셨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으시고 아주 무능력하게 그리고 무방비로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인간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이 이렇게 무능력하게 당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절대로 세속적인 가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영적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신 까닭은 *버림이 진정한 리더십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속적인 리더십은 나타냄, 곧 자기 PR의 리더십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한 리더십이고 남들의 안위나 인격은 아랑곳 하지 않는 권력집착의 리더십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이해할 수 없는 반대의 리더십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왕의 왕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셨지만 단 한 마디의 항의나 항거를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끌려 다니셨습니다. 실컷 즐기는 대로 당하셨고 당신의 몸을 그들에게 내어 놓았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내어놓으신 이유는 버림만이 구원의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런 삶의 지표를 공생애 중, 여러 차례 선언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소위 황금률이라고 지칭되는 마태복음 7:12절에서 이렇게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또한 주님은 세배대의 아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을 위해 청탁을 하기 위해 찾아온 그들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20:27-28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동시에 요한에 의해 이런 주님의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4-25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주님은 당신이 이렇게 선포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가 없는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입니다. 실컷 놀림과 희롱을 당하셨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삶을 훗날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주님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버리는 삶은 외형적으로 버리는 것 같아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가장 위대한 차지함임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을 통해 배울 점이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이후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게 된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친 뒤에 그들에게서 노획한 어떤 좋은 것도 취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가장 좋은 양과 소의 기름진 것을 남겨두는 불신앙을 저질렀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폐하실 것이며 그를 버리실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앞에 둔 사울의 태도를 사무엘상 15:30절에서 보면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나를 높이사’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가 되면 질병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삶은 결코‘나를 높이사’가 되면 안 됩니다. ‘나를 낮추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그 낮추심으로 인해 주님은 모든 조롱과 희롱 당하심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히브리 기자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2-3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사야 53:5-6절에서 제 2 이사야는 이렇게 고난 받는 종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CS 루이스는 자기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악은 교만이다. 교만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이고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교만과는 아주 정반대의 삶을 사심으로 도리어 가장 아름다움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끌고 다니며 실컷 즐겼던 바로 그들을 위해 버리심의 리더십을 보여 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버리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