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2.05. 20 셀 사역2024-04-22 11:4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지난 주간 내가 꼭 지체들과 나누고 싶었던 감동적인 스토리를 소개하고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421장 (내가 예수 믿고서)
● 423장 (먹보다도 더 검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마가복음 14:1-2    하지 맙시다.
1) 유월절이라는 유대의 절기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마가가 접목시킨 이유는?
* 본문 설교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자.  

2)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절기에 죽이지 말자고 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 1-2절을 통하여 나누어 보자.  

3) 왜 오늘날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반면 나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 선포된 설교를 중심으로 진솔하게 나누어 보라.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할 수 있으면 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매 주일마다 새신자가 등록하는 교회가 되도록 재생산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세인 비전을 갖고 함께 달려갈 긍정적인 일꾼을 보내주옵소서.
 ③ 성령님을 춤추시는 성령의 임재가 한 주간 교회와 세인 지체들의 가정에 충만하도록 인도 하옵소서.
 ④ 지역 소그룹 셀이 역동적으로 사역하게 하시고 진행 중인 두 날개 양육 시스템 이 주의 인도하심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⑤ 6월 5일부터 진행되는 제자대학 1학기와 5월 중에 실시될 열린 모임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게
    하옵소서. 
 ⑥ 양육 2기의 지속적인 성장을 주옵소서.
 ⑦ 12월에 전인적 소그룹 셀의 번식을 향해 달려가는 12 진(陣)되게 하옵소서.
 ⑧ 교회학교가 부흥될 수 있도록 부교역자들과 지체들이 열심을 다해 사역할 수 있도록
 ⑨ 2015년에 헌당을 할 수 있는 부흥을 주옵소서.
 ⑩ 건축의 모든 마무리 과정도 함께 해 주시고 손동만 집사를 끝까지 축복하옵소서.
2) 헌금 / 광고
3) 주기도문
4) 목원들의 기도제목 나누기  

 
설교요약 (SUMMARY)
2012년 5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가복음 117번째 강해)
제목: 하지 말자 / 본문: 마가복음 14:1-2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 화요일 오후 즈음을 시간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징조를 예고하시고 난 뒤에 아주 중요한 선포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1-2절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 선포는 제자들에게는 그리 낯선 선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 선포는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신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고지의 무게는 주님의 그 예고하심의 시점이 임박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주님의 이 선포 뒤의 배경이 마가에 의하면 시간적인 쪽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고합니다. 마가는 주님이 죽으심이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말씀합니다. 마가는 분명히 주님이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심을 재확인하는 예고편에서 그 시간이 유월절이 시작되는 이틀 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유월절은 니산월(유대의 양력으로 3-4월) 14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니산월 14일 낮에 유월절 양을 잡으면서 시작되어 해가 진 뒤 곧 니산월 15일 저녁에 유월절 식사를 먹음으로서 마무리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동시에 또 하나의 절기는 무교절입니다. 이른 바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뒤에 곧이어 시작되는 7일간의 절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본문 1-2절은 순수한 마가의 편집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마가의 편집의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가는 아주 의도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절기를 유월절, 무교절과 유비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의도적으로 유비시키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월절과 무교절은 민족 해방과 관계되어 있는 최대의 명절인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곧바로 유대인들의 구원과 해방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이런 편집 의도는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중요한 강조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 종교권력자들에 대한 상대적 위기감과 심각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1-2절에서“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말씀합니다. 1세기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인구들이 어림잡아 약 200만 명이라고 자신의 책에 기술했습니다. 이 말은 당시 예루살렘의 유월절 절기의 위용과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유대 민족의 인구가 가장 많이 집결하는 유월절 절기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긴장된 시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점령국 로마 당국은 물론이고 분봉 왕이었던 헤롯과 그의 내각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산헤드린 종교 당국까지 신경이 가는 예민한 시기임은 모두에게 공통분모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에 인구 집중이 가장 많았을 유월절과 무교절 시기였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앞서 언급한 세 지배 체제는 어떤 의미에서 이 유월절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번 유월절에 가장 민감한 지도체제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유대 종교 권력이었습니다. 시기도 시기이지만 예수라는 자 때문에 당시의 여론이 그들에게는 아주 불리했기 때문입니다. 불과 활동 한 지 3년도 채 안 되었는데 유대 전역에 예수라는 자의 영향력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막대했습니다. 그의 활동 이력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적인 권위와 능력과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놔 둘 경우 자신들의 입지는 뿌리 채 흔들릴 수 있는 심각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난공불락의 터가 무너지는 위기의식이 그들에게 팽배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결정한 결론은 예수 죽이기였습니다. 이 방법이 최선이었고 그들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이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만약에 지금 유월절 절기를 즈음하여 그를 체포하고 죽이게 되면 그를 따르는 자들의 소요가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명분이요 시기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은 은밀한 살해였습니다. 본문 1절에 기록된 헬라어‘엔 돌로’는 우리나라 성경에는‘방도로’ 번역이 되었지만 엄밀한 의미는‘은밀하게’입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아주 은밀하게 예수 죽이기에 의견을 모은 것입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의견을 개진한 저들이 내린 결론이 바로 본문 2절입니다.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말씀합니다. 대중적으로 그의 죽음을 공론화시키지 말고 아주 은밀하게 예수를 죽이자는 쪽으로 결의한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되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는 피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음모는 말 할 것도 없이 민중적인 소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당시에 정점을 찍고 있었기에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당연한 처사일 수 있습니다.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교의 신약 교수인 라마 윌리암슨 박사는 자신의 주석에서 본문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비록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다른 이유에 대하여 말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두려움과 시기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의 이성적인 이유들은 잘못된 것들로 드러날 수 있는 실제적인 이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주해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를 은밀하게 죽이고자 했던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단면에서 오늘날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예수를 거부하는 실제적인 이유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지적에 100% 공감합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이제는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하겠습니다. 왜 오늘날 많은 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수긍하면서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 예수를 바르게 믿을 자신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행적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지도층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게 된 예수의 행적은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구약에 제시된 메시아 바로 그 분임을 그들은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과 이방 지역에서 행하셨던 기적과 또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어보면 영락없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리스도이자 메시아였음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수께서 서슴없이 갈파하신 강력한 메시지들은 자신들이 생계유지의 최고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유대 종교가 타락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임을 본인들도 심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터에 예수님의 직격탄은 그들을 그로기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들이 종교를 이용한 세속적인 이익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고 그들이 무소불휘로 휘두르고 있었던 종교 권력도 종말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물리력과 공권혁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를 짓누르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양심의 목소리인 예수 받아들이기가 아닌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예수 죽이기로 결론을 맺은 것입니다.
이제 1세기 본문의 내용을 우리들의 시대에 맞는 재해석으로 들어가 보면 오늘 본문의 영적인 은혜는 예수 안 믿는 자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메시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들은 세인교회라는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세인교회 교인들입니다. 세인 교회 교인이라는 이름을 세상 사람들이 붙여 주면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교인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그 교회라는 공동체에 이름이 올려 져 있는 종교적 구성원의 사람을 말할 때 지칭되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전부에게‘교인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 중에 어불성설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헬라어‘크리스티아누스’는‘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교회 안에서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상당수 현대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냥 교인으로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곧 나의 삶의 자화상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이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다고 선포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별로 불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더 유리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바르게 믿으려고 하는 삶이 아닌 예수를 즐기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입니다.
이렇듯 오늘의 시대는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고 있는 자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은혜요 도전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어도 자신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예수로 고백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양산되는 바로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하는 그리스도인 된 자의 결론입니다.
우리 모두 바른 신앙인으로 서기 위해 세상의 가치와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원하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