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2.04.22 셀 사역2024-04-22 11:4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 인생의 여정 속에서 상식 이하의 일들을 당했던 기억이 있으면 말해보자. (교회 외적인 경우)  

 
경배와 찬양 (WORSHOP)

● 신랑 되신 예수께서 (찬송가 175장)       
●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176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마가복음 13:9-13  끝까지 견디는 자
1)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일어날 세 번째의 징조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 9절
* 12절  

2) 9절과 12절을 참고할 때 주님이 예언하신 세 번째의 징조를 오늘의 언어로 표현해 보자.
* 설교의 테마를 중심으로  

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주님의 당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설교의 마지막 교훈을 중심으로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매 주일마다 새신자가 등록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마음, 같은 열매로
    같은 비전을 꿈꿀 수 있는 일군을 보내주옵소서.
  ③ 성령님을 춤추시게 하는 교회와 지체들이 되게 하옵소서.
  ④ 열린 모임 학교 3주차 사역을 위해
  ⑤ 제자대학 1학기를 위해 (5월 중에 개강 예정)
  ⑥ 양육 2기를 위하여
  ⑦ 12월에 번식을 향해 달려가는 12 진(陣)되게 하옵소서.
  ⑧ 4월 29일 입당예배가 승리하게 하옵소서.
  ⑨ 2015년에 하나님의 교회를 헌당하게 하옵소서.
  ⑩ 손동만 집사를 끝까지 축복하옵소서.
2) 헌금/ 광고
3) 주기도문
4)목원들의 기도제목 나누기  

 
설교요약 (SUMMARY)
2012년 4월 2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가복음 114번째 강해)
본문: 마가복음 13:9-13 / 제목: 끝까지 견디는 자오늘 본문은 지난 3주 전부터 계속해서 살피고 있는 마가복음 13장이라는 소위 종말장이라는 기사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감람산에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징조와 사인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 때가 가까울수록 미혹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창궐할 것을 살펴보았고 전쟁의 시나리오들과 기근과 지진으로 대변되는 자연적이고 환경적인 재앙들이 빈번할 것임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차원에서 3번째의 징조와 사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주님이 집중하셨던 9절과 12절의 말씀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와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AD 70년을 획으로 하는 예루살렘 멸망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셨습니다. 본문의 맥락을 중심으로 해석하면 ‘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공적인 사람들에게 넘겨져 심각한 종교적 핍박을 당하게 것이다. (공회에 넘겨주겠고) ② 그런 뒤에 그들에게 매를 맞게 될 것이다.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③ 너희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자들은 권력자들이 될 것이다.(너희가 권력자와 임금들 앞에 서리니) ④ 이런 고통이 임하면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비극이 임하게 될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이런 고통을 겪는 자들은 대환란 이후에 남아 있는 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공중 재림 시에 교회는 들림 받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이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고통은 대환란 때 예수를 거부하여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라고 제한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시기적인 설정은 피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종말론적인 해석은 가능하면 문자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문맥적인 해석이 주는 종말의 시대에 임하는 비극을 오늘의 언어로 정의하면 상식의 실종입니다.
* 상식의 실종입니다.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의 파괴로 정의되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AD 64년에 일어난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의 핍박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D 64년에는 로마 황제 네로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로마를 새로운 도시로 만들겠다는 광신적인 집착으로 벌인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본인의 소행으로 밝혀지는 위기의 순간에 네로가 그 범죄를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자행했다고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당시 최고의 도시였던 로마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졸지에 너무나도 무서운 핍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아무런 죄도 없이 콜로세움을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사자들에게 찢겨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네로의 박해를 연상하면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만 부각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도리어 로마에 임한 대 핍박의 시대에 죽음의 공포로 인해 배교한 자들이 더 많다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시대에 배교자들은 엄연히 존재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 유지를 위해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상식을 저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적인 상식을 내 팽개친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위해 형제가 형제를 밀고하고 부모 자식 간에도 관계가 파괴되어 이런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통시적인 갈파는 정확했습니다. 단지 유대 땅에서 만의 그리스도인들의 배교와 상식의 침몰을 예언하신 것이 아니라 근동 지역을 아우르는 시대적인 상황에 대하여 예측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나로 말미암아”(9절 중반절)에서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라는 대목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감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오늘날 민감하게 당하는 고난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양보해야 합니다. 또 손해 보아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넘어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런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베드로전서 2:19절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린도후서 4:8-10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상식임을 알기에 이렇게 손해를 보고 사는 것,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며 지극히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는 시대 말기적인 사인으로 분명하게 주님이 본문에서 공언하신 내용이 바로 이 상식의 상실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예언의 요점은 마지막 때에 비상식을 요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상식의 일들이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상식이 마비되는 일들의 도래를 예고하신 것입니다. 도무지 예수 믿는 자들인지에 대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픔의 시대인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본문 마지막 절에서 주님은 해답을 제시합니다. 13절에서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말씀합니다.  주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잘 견디라고’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견디라’로 번역된 헬라어‘휘포메노’는 통상적으로‘인내하다. 참다.’의 의미로 번역되지만 원래의 문자적인 의미는‘밑에서 머무르다.’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문자적인 의미를 살려 본문을 해석하면 상식이 실종된 양심마비의 시대에 살면서 그 자리를 회피하지 말고 머물러 싸우라는 해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만만치 않은 영적인 전투의 시대 속에서 살지만 비겁하게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피 흘리기까지 영적인 대적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히브리서 12:4절에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선언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견딤입니다. 그냥 무방비로 노출되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참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도망하지 않고 그 현장에서 피 흘리기까지 머물러 싸우는 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끝까지 견디는 자입니다.
영적인 마비를 불러일으키는 일체의 영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끝까지 견디는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