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유전인자가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우성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성격도, 생김새도 친가보다는 외가에 더 가까운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좋은 유전인자만을 부모에게 물려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해서 나름 유전자 중에 열등한 인자가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여 살아내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살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잘 달리려고 나름 노력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신체적인 유감 중에 하나가 치아 상태입니다. 대대로 치열이 고르지 않고 잇몸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은 점이 저를 비롯한 형제들이 적지 않게 사춘기 시절부터 상대적으로 고통스러워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님은 신식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신 분이었기에 자녀들의 치아 관리에 대하여 그리 철저하신 분이 아니었기에 양치질을 그리 중요하게 교육하시지 않아 저를 비롯한 형제들은 자라면서 치아 불량 상태가 더 악화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처럼 치과술이 뛰어난 시대가 아니었기에 성형이나 치열 교정에 대한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던 성장과정을 보내 항상 치아는 청소년 시절은 물론 청년 시절까지 숨기고 싶은 트라우마였습니다. 이후 어느 정도의 치열교정과 치과 치료를 통해 이제는 그런 대로 견딜만한 상태가 되었지만 어려서 이미 버린 치아의 성형 자국들은 지금도 계속 돌보아야 하는 골치 아픈 대상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주간에 그 중에 하나를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와서 아프지만 발치(拔齒)를 했습니다. 15년 전, 제천에 와서 보철을 한 어금니가 속으로 염증을 유발시켜 그 때마다 치료를 해서 버텼지만 더 이상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판단 때문에 치아를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한 달 뒤에 요즈음 인기가 있는 임플란트를 해서 어금니를 보강할 것인가? 아니면 옆에 있는 치아를 이용한 또 다른 보철 치료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발치를 하는 날, 치료하는 치과 의사가 저에게 한 말이 이상하게도 영적인 교훈처럼 들렸습니다.
“목사님, 부모님으로 물려받은 치아 하나를 잃게 된 것은 상당히 아프지만, 그대로 두면 옆에 치아까지 잃을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결단했습니다. 최선을 유지하지 못했지만 차선으로 최선을 메우겠습니다.”
“상한 치아를 그대로 방치하면 옆에 있는 치아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최선에는 실패했지만 차선으로 최선을 메워보겠습니다.”말이 왜 그리 크게 들렸든지 천둥 같았습니다.
믿음이 좋은 치과의사이기에 목사인 환자인 저에게 표현을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그의 말을 듣다가 이런 감회가 밀려왔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삶, 교회 공동체의 건강성 유지도 같은 공식이지 않을까! 제일 좋은 것은 최선의 상태 유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삶과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합니까? 해서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최선의 실패를 혹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차선은 유지해야 하는 의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래 전, 시인 박노해가 쓴 ‘슬픔의 힘’이라는 시를 읽다가 줄기찬 차선(次善)의 노력을 보는 것 같아 울컥했습니다.
울지 마 사랑한 만큼 슬픈 거니까/울지 마 슬픔의 힘으로 가는 거니까/울지 마 네 슬픔이 터져 빛이 될 거니까/
왜 슬플까를 묻다가 이루지 못한 절망 때문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그 슬픔을 슬픔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승화시킨 것을 보며 포기하지 않는 슬픔의 힘이 도리어 너무 고맙고 감사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목사로 사는 동안 최선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차선으로 최선을 메우는 또 다른 삶의 역동을 난 기대하며 살렵니다. 소중한 어금니를 잃었지만 그곳에 참 소중한 것을 채우는 공부를 했습니다.
아뿔싸, 목사의 직업의식 때문에 본질을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치아를 잃지 않는 최선은 정기적인 양치질과 치아 관리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