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이렇게 초청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매년 마다 잊지 않고 저희들을 불러주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할 텐데 장애우들을 위해 관심 가져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천 밀알 선교단을 섬기는 지도 목사님이 저에게 전해준 감사 인사입니다. 듣기에 따라 상투적인 인사말처럼 들리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인사성 멘트로 듣지 않습니다. 진정성이 있는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대외 섬김 사역인 밀알선교단과 함께 하는 초청예배를 드리고 난 뒤에 장애우를 둔 어머니께서 저에게 담소 중에 이렇게 진언을 해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섬기는 교회는 ○○교회입니다. 저희 교회는 제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교회이기에 밀알 선교단을 섬기는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섬김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으로 삭히기는 하지만 못내 섭섭할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를 전언해 준 그 지체의 이 말은 급조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은 정말로 해야 할 사역인데도 눈감고 있는 교회를 향한 비수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헌데 교회가 섬겨야하는 대상이고, 교회가 눈을 마주쳐야하는 사역이고, 교회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사역의 현장이 어찌 장애우 선교회 한 곳이겠습니까? 실상은 너무 많아 안쓰럽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목사님, 너무 많아서 개교회가 담당할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중앙정부가 해야 할 일이고, 지방정부가 손을 써야 하는 일이지 한 교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큽니다.” 동의합니다. 정말로 그런 차원의 일인 소외된 그룹들을 보듬는 일이 한 개 교회에서 감당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님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고자하는 일은 우리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홀로 계신 어르신을 돕는 일이든, 가정 형편 때문에 생리대를 구입하지 못하는 소녀들을 돕는 일이든, 지난주에 행한 장애우를 돕는 일이든, 아니면 이번 주에 할 조손 가정 아이들을 돕는 일이든, 제천에 있는 재래시장을 방문하여 라면 하나를 구입하는 일이든, 차상위 계층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이든, 위안부 어르신들을 돕는 일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 하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뇌성마비 중증 장애아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권사님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보았습니다. 휠체어를 밀어 차에 올려주는 집사님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겸연쩍어 쑥스러워 하는 형제를 안아주는 지체를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는 실상을 보았습니다. 잘 돌보거나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각박함 속에서, 따뜻한 식사 한 그릇의 감사를 잊지 않고 도리어 우리 교회를 찾아준 장애우들이 건네는 인사말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방언처럼 들렸습니다. 늦은 봄인데 벌써 여름 더위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때 이른 더위에도 불구하고 손수 떡을 빚어 섬기고, 전을 부치며 땀을 흘리고, 맡은 부서의 장이기에 본업의 장이 청주임에도 만사를 제치고 제천으로 올라온 부장집사님을 보면서 더불어 정성을 다해 장애우들을 섬기는 일체의 지체들을 보면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세인교회를 향하여 부족한 사람은 이렇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래, 이게 교회다! 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고, 성도는 그래서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성도임을 각인해 봅니다. 이런 교회, 이게 교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