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화요일) 묵상 갈릴리 예수는 나의 구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19:9-16, 신명기 23:21-24:4, 10-15, 야고보서 2:1-13 꽃물 (말씀 새기기) 야고보서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마중물 (말씀 묵상)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고 학자들이 동의한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야고보가 어떤 믿음의 과정을 거쳐 왔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성경의 내증에 국한한다면 야고보는 예수에 대하여 믿음이 없었던 자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마태복음 13:53-5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사역하였을 때의 반응이 실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했고, 믿지 않았다고 마태는 보고한다. 마태복음 13:57-58절의 기록이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동시에 마가복음 3장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의 신성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다는 암시도 발견된다. 공생애 사역 중에 있는 예수를 정신병자로 몰았으니 말이다. 복음서 내증이 이런 정황을 증언할 때, 야고보도 예외일 수 없다. 그 역시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그가 사도행전의 기록과 야고보서의 기록을 종합할 때,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예루살렘 제 1차 공회의 수장이었던 것을 물론이요, 루터가 쓰레기라고 폄훼했던 야고보서의 검증된 저자일 가능성이 높기에 그는 분명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추론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편지를 시작한 서두에 밝힌 것처럼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초대 교회를 섬겼다. 이런 과정을 겪었던 야고보였기에 오늘 성서일과에서 빍힌 한 단어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갈릴리에서 민초들과 함께 사셨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식인가? 노파심을 언급하고 싶다. 내가 섬기는 한국교회가 갈릴리에서 아파하던 민초들과 함께 했던 예수를 경원시했다. 그 결과, 오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예수의 삶과 유리된 유감스러움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기에 갈릴리에서 민초들과 함께 했던 예수의 삶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일치시키는 작업이 이미 굳어져 녹록하지 않겠지만 포기하지 말아야 할 교회의 미션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극단적 진보주의자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있다. 갈릴리 예수의 삶을 진정성이 있게 이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야고보처럼 변화된 자이어야 한다는 전제다. 세속적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부활과 성령의 능력을 맛본 뒤에 예수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신앙의 결국이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결기하곤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밑힘 삼아 갈릴리에서 함께 하셨던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삶이 신앙이다. 나는 이것이 베드로가 고백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테제에 합당한 전인격적 구원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예수를 이렇게 믿는다. 갈릴리에서 아픈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영육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두레박 (질문) 나는 우리 교회가 예수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드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를 이원화시키지 않게 하소서. 편벽되지 않게 하소서. 삶을 배우게 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한쪽으로 편행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기도하고 공부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청년, 학생 동계수련회 중입니다. 저들이 교회의 미래인데 주님과의 인격적 엔카운터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