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감정
직업으로 말하면 목사라는 직업은 참 힘든 직업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 또한 아버지의 길을 가고 있는 아들이 때로는 안쓰럽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근래 들어 세간에서 오르내리는 개독교의 ‘먹사’ 라는 오명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먹고 살기 어려운 직업 중에 하나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진정성을 갖고 주를 따르려는 마음으로 목사라는 길에 들어선 자들이라면 일련의 이런 것들은 이미 각오한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양의 현장에서 지난 30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현직 목사로 고백하자면 목사로 산다는 것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피하고 싶은 직업 중에 하나라고 뒤늦은 고백을 하고 싶습니다. 왜일까요? 양가감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무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40대 초반 진해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 사역의 일정이 오전에는 장례식이, 오후에는 결혼 주례식이 잡혔던 일정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오전 장례식은 예기치 않은 사고사로 인해 세상을 떠난 고인의 예배였기에 유족들을 위로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이어 오후에 진행된 결혼 주례에 가서는 오전에 언제 울었던 적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화사하게 웃어주며 결혼 집례를 진행했습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루 동안 겪으면서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난 주간, 안천배, 김선영 집사가 경영하는 중식점에 들려 부교역자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홀에 들어서는 데 순간, 너무 놀랐습니다. 홀을 가득 메운 손님들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로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전에 경영하던 장소에서는 장사가 되지 않아 죽어라, 죽어라 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주방에서 정신없이 음식 만들기에 정신없는 부부를 보면서 그들을 섬기는 목사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감사한 한쪽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계속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면서 이번에는 또 한쪽의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중식점이라는 이유 때문에 뜨거운 화로에서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집사님 부부를 보며 갑자기 건강이 염려되었습니다. 불에 그슬린 냄새들은 호흡기 질환에 치명적이라는 데 괜찮을까, 단 일분도 쉬지 못하고 저렇게 몸을 혹사해도 되는 걸까, 아들딸을 총동원하여 생업 전선에 올인 하고 있지만 그래도 건강을 생각하면 직원을 더 고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마음 한편에 안쓰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옛날, 짚신 장사를 아들과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애처로움이 있었다는 것을 학창 시절에 배웠는데 바로 그 양가감정이 저에게도 밀려왔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목사께서 사석에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연세대학교를 우수한 결과로 합격했는데 시무 장로 딸이 같은 대학에서 낙방해서 거의 4년 내내 몹쓸 죄인의 심정으로 지냈다는 그 웃픈 이야기를. 목사가 하기 어려운 직업(?)인 이유는 연이어,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양가감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 곤비함 때문입니다. 그 곤란함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안팎의 공격이 참 치열한 시대에서 목사는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의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직업의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청해 짬뽕을 생각하면 그래도 참 기쁘고 기쁩니다. 성도가 잘 되는 것을 눈으로 보는 목사에게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또 있겠습니까? 청해 짬뽕이 잘 되기를 계속해서 기도해 봅니다. 아, 목사직을 감당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 주일이 무지 빨리 오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왜 주일은 이렇게 빨리 오지. 후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