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44번째 강해) 본문 : 갈라디아서 6:14-18 제목 : 은혜가 결론입니다. 서론) 2018년 11월 11일 주일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꼭 1년 전입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 큰 보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강해 설교의 한 쟝르를 마감할 때 오는 감동입니다. 지난 1년 동안 갈라디아서를 붙들고 나름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작은 로마서라고 부르는 갈라디아서 안에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반드시 섭렵해야 예수 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하나로 충분하다는 복음의 능력은 결코 다른 어떤 것으로 변질시키거나 훼손시키지 말아야 함도 배웠습니다. 이것을 강조한 바울의 갈라디아서 메시지는 다른 여타 서신에 비해 대단히 강한 톤이었음도 공부했습니다. 절대로 이 분명하고도 선명한 메시지에 대하여 바울은 매우 단호했습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를 변질시켰던 갈라디아 교회 안의 배교자들은 물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포할 정도로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불화살 같은 강경모드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갈라디아서는 전투 서신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은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절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저 역시 바울의 이 메시지 중에 10절을 목회 여정 중 길라잡이로 삼아 달려왔음을 교우들에게 수차례 언급했을 정도로 바울의 이 선언에 대하여 적극 지지하며 동의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 강경한 태도와 자세를 서신 내내 유지합니다. 그 증언 중에 하나가 오늘 읽은 본문 14-17절에서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우리는 지난 43번에 걸친 강해 사역을 통해 바울의 이러한 면모와 그의 신학적인 바탕에 대하여 심도 있게 공부했고 성찰해 왔습니다. 대쪽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한 바울,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십자가 신학에 대해서는 한 발도 뒤로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강경파 바울을 우리는 지난 43번의 공부를 통해 족히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서를 마치는 마지막 바울의 한 마디가 왠지 마음을 ‘쨘’하게 만드는 극적 반전의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본론) 본문 마지막 절을 소리 내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저는 두 단어를 오늘 설교를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감하는 마지막 절에서 그토록 강한 메시지로 경고하던 수신자들인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배교자까지 포함하여)을 향하여 이렇게 호칭합니다. ‘형제들아’ 이 단어는 ‘자궁’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델푸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엮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에게 붙여주는 단어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헬라어 단어 ‘필리아’ 즉 ‘형제의 사랑’이 담보된 막역지간을 말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종합해 본다면 그리스도 예수 보혈이라는 영적 자궁에서 흘리는 보혈이라는 사랑안에서 엮어진 관계인 사람들에게 붙이는 단어가 바로 ‘형제들아’에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편지의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언급한 것을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설교자인 저는 해석합니다. ⓵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배교자들이 돌아와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⓶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일체의 성도들을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절절하고 따뜻한 단어로 마지막 절에서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호칭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렇게 호칭한 바울은 여타 다른 서신에서와 같이 같은 축도로 편지를 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또 하나 주목하려는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언어인 은혜라는 이 단어는 그래서 참 소중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참 세상을 많이 답습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교회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하면 세상이 답습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교회는 세상을 이끄는 견인차의 역할을 했습니다. 허나 요즈음 교회는 무모하게도 세상의 방식을 너무 많이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기실, 세상이 만들어내는 최첨단의 메커니즘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앞서갑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그 내용들을 앞서 가거나 따라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교회가 그것을 아등바등 따라가려는 아둔함이 보일 때마다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교회는 교회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장점들을 살려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기자가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작가이자 프리랜서인 필립 얀시와 인터뷰를 하다가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회만이 유일하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지 이 질문을 받은 얀시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건 은혜지요.” 책을 통해서 이 글을 처음 만났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왜? 은혜는 세상도 베풉니다. 물질이 있는 사람들은 동정심을 갖고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아주 가끔 재판정에서 정서적 공감을 한 재판관들이 어쩔 수 없는 죄인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이른바 장발장식의 은혜도 베풉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교회만이 주는 것이라는 논리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어떤 은혜입니까?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셨던 은혜’입니다. 로마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정말로 눈물겹도록 엄청난 사랑의 절정체인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위해 오셔서 죽으신 은혜”입니다. 뉴욕 리디머 교회를 섬기는 티머시 켈러 목사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신을 찾아내고 싶다면, 너희가 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너희가 더 높은 의식을 갖고 싶다면, 신적 존재와 교통하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너희는 무언가를 행하여야 한다. 너희는 힘을 모아야 하고, 규율을 지켜야 한다. 너희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고, 그런 다음 그 정신을 채워 넣어야 한다.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고 싶다면, 너 자신을 올바르게 만들고 싶다면 너의 이성과 힘을 다하여서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이와 정반대다. 기독교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 주기 위해 오셨다. (중략) 기독교는 자신의 결함이 단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심각하게 만신창이가 되어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강함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티머시 켈러, “예수를 만나다.”, 베가북스, pp,40-4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 오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즉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오로지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은혜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배교하며 이 은혜를 저버린 자들을 포함한 일체의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을 향하여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선포하며 글을 맺은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미국 컬럼비아 신학대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챨스 카우사 교수는 이런 바울의 심정에 동의했기에 다음과 같이 18절을 주석했습니다. “바울의 18절 마감 축도는 다른 바울 서신들에서 나오는 친숙한 본보기를 따르고 있다. 그것은 자주 사용된 축복이다. 그렇지만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의 이 축도는 이미 바울이 앞선 6장을 통해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요구했던 가장 기초적인 생명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고 받아들이도록 강조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찰스 카우사, 갈라디아서 주석- 현대성서주석, 장로교출판사, p,217.) 이상의 갈라디아서 6:18절 주석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얻어야 할 마지막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결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은혜라는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가 결론입니다. 그런데 전제했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되는 은혜입니다. 유사 은혜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이비 은혜여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이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 마크 뷰캐넌의 역작인 “Your God is too safe.”를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소개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이 책에서 너무 귀한 은혜를 받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 텍스트의 배경을 교우들에게 먼저 전합니다. 누가복음 17:11-19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너무나 잘 알고 익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주님의 은혜로 문둥병이라는 당시 천형에서 치유 받고 해방된 10명의 환자들에 얽혀 있는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마크 뷰캐넌 목사가 이 구절을 해석한 한 문장에서 정말로 아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설교의 언어로 대시한다면 정말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뷰캐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린 것을 예배라고 정의했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P,395) 제가 왜 이 문장에 열광했는지 아십니까? 저주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9명의 문둥병자는 오늘도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런 영적 문둥병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서 치유된 은혜를 받은 자들은 우리 주변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상당수는 주 예수께서 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종교적인 헌신이나 돈 주고 돈 먹는 식의 보상을 받은 정도로 생각하는 영적 무례를 범하는 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경성할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우리 세인교회에는 없다고 자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우리 세인교회에도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이런 유감스러움 속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라는 진짜 은혜를 받아 주님께 예배하러 온 문둥병자와 같은 은혜수여자가 우리 교회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은혜를 아는 자, 맛 본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은혜가 무엇입니까?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고침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그 분에게로 내 마음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진짜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멘로파크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오트버그 목사는 이렇게 서늘한 비수를 그의 글에서 던졌습니다.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영혼이 헌신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다.”(존 오트버그, “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국제제자훈련원, p,117.) 은혜는 내가 좋아하는 그 어떤 것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 우리의 신혼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결론이며, 이강덕 목사의 결론이고, 갈라디아서의 결론이며, 성경의 결론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갈라디아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갈라디아서 6:1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은 뒤에 잊지 않고 한 가지를 의도적으로 유도했습니다. “아멘”입니다. 쌍 팔년 도에 부흥사들이 아주 값싸게 남발시킨 것이 있다면 아마도 아멘일 것입니다. 해서 아멘을 강요하는 것에 식상한 성도가 있고, 거부감이 있는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지금도 은혜를 공급하고 계신다는 사실에는 주저 없이 아멘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공식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내가 믿겠다는 공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감하면서 교우들에게 몇 구절을 낭독하겠습니다. 다 같이 뜨거운 심정으로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6-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