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스티그마 (8)2024-02-28 17:11
작성자 Level 10

2019년 11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43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6:17

제목 스티그마 (8)

 

서론)

 

기독교 문학의 고전 중에 고전이라고 하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지옥 편중에 34곡을 보면 지옥의 맨 밑바닥인 주데카를 배경으로 심판을 받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주데카는 주님을 판 유다에게서 유래된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가 마왕인 루키페르의 입에 물려 있는 고통을 유다와 함께 당하고 있는 것으로 단테는 지옥편의 대미를 장식하며 글을 마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민주 공화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정치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율리우스 씨저를 암살한 자들인데 아마도 단테는 그들의 죄를 크게 여겼던 것으로 보이기에 가롯 유다와 함께 이 두 사람이 거주하던 장소를 지옥의 맨 밑바닥인 주데카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하튼 단테는 이 세 사람이 마왕 루키페르에게 고통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지옥 편 34곡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운데서 제일 큰 벌을 받고 있는 망령은 가롯 유다다머리는 입 안으로 들어갔고 다리는 밖에 걸쳐 있구나머리가 아래쪽으로 대롱대롱 매달린 두 망령 중 검은 색 얼굴에 매달린 놈이 브루투스다봐라말도 못하고 몸을 비비 꼬는구나몸이 더 커 보이는 놈은 카시우스다.”(단테신곡-지옥편세계문학전집 150, 민음사,p,350.)

문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단체가 저술한 신곡지옥연옥천국 편 등 이 세 가지의 작품을 고전문학이라고 하여 지성인들이 반드시 독서를 해야 하는 양서로 분류하곤 합니다.

해서 저는 일반대학에서 영문학도로 공부할 때 라틴어를 영어로 번역한 원서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신앙이 돈독했던 때가 아니라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을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황당무계한 픽션으로 여겼지 내용 자체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된 이후이 책을 여러 차례 다시 접하면서 영문학도 시절과는 전혀 다른 시각 즉 영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며 의미 있게 단테의 이 고전을 가슴에 담아 두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분명히 그만이 갖고 있는 종교적인 상상의 나래를 글로 표현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곡의 패러다임 자체는 허점투성인 말도 안 되는 전형적으로 문학자가 만들어낸 상상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신곡 저술의 패러다임은 적어도 히브리서 9:27절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또한 요한복음 5:28-29절을 착안하여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날이 임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흔히 종말론적인 신앙이라고 명명합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표현하면 으레 갖게 되는 선입관이 지성적이지 못한 태도사이비적이라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신앙 없이 무슨 경주를 합니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것은 지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의 타당한 근거임을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 갈라디아서 43번째 강해를 전개하면서 본문은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봄고난주간과 부활주일에 맞물려 스티그마를 제목을 설정해 놓고 7번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며 제 6차 말씀집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주제절이 바로 본문이었습니다.

오늘 43번째 강해 준비를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설교 제목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봄 실시한 춘계 말씀집회와 연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해서 오늘은 스티그마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을 기초로 스티그마 8’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읽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이렇게 강한 톤의 메시지를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생각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은 바울을 괴롭힌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추적일 것입니다.

괴롭게 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코포스는 일전에 한 번 교우들과 나눈 것처럼 칼에 베이다.’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저는 잘못하면 오른쪽 눈을 실명할 뻔했습니다.

친구와 장난을 하다가 당시 연필을 깎는 칼에 오른 쪽 눈가를 베었기 때문입니다.

약 3CM 정도만 밑으로 칼이 내려왔으면 평생 한쪽 눈을 잃은 시력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당시 눈 주위가 약 10CM가 찢어져서 봉합 수술을 받았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그 때 칼에 베이는 아픔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바울은 이런 베임을 당했다고 고백합니다.

도대체 바울은 이렇게 괴롭히던 베임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눈이라도 빼어줄 것처럼 호의적이었던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이 배교하자 당신이 무슨 사도냐고 공박하는 자로 배신한 것에 대한 치욕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버렸던 배교자들과 그들을 부축인 거짓 교사들에게 당하던 영적 테러 바로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당하던 이 괴로움이 얼마나 컸을까를 목회자이기에 나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30-32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이 구절은 바울이 밀레도 항구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제 순교여행이 될지 모르는 순간에 자기를 찾아온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를 남기는 장면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서 이 구절을 읽다보면 유언치고는 조금은 비장해 보입니다.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자적인 입장에서 그 교회 장로들에게 다음을 경성시킵니다.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하나는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에베소 교회를 공격할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더 중요한 하나는 그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은 이 중에 있는 장로들 가운데도 존재한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어그러지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디아스트렢포는 잘못된 말로 가르친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한자 단어로 歪曲한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 가르치는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아주 냉정한 해석이 담보됩니다.

바울의 목회 기간 동안 3년 동안이나 눈물을 흘려가면서 씨앗을 뿌린 목양의 은혜를 맛 본 자였습니다.

전혀 바울에 대한 문외한이거나 그가 행한 목양의 사랑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은 충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이들이 어그러진 말로 에베소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베는 것이고그것은 곧 바울을 베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얼마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고 아픈 일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날 일에 비해 훨씬 전의 사건이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서 자기를 베는 일을 먼저 당하고 있는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전반절에서 이렇게 소리를 친 것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아픈 소리요애석한 소리였지만 한편으로는 천둥 같은 소리요벼락같은 외침이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외침이 가볍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

아팠지만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너무나도 분명한 무기가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후반절에서 제시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여기에 기록된 흔적을 헬라어로 스티그마라 했습니다.

이 단어에서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냥 흔적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성경은 스티그마타라고 즉 흔적들’ 이라는 복수 명사로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칼로 베임을 당할 정도의 고통을 당했지만 그러나 이 고통을 이기게 해 준 다양한 무언가가 있음을 시사했다는 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흔적들이 과연 무엇일까?

성경적인 내증을 한 부분 소개하면 왜 스티그마가 아니고 스티그마타’ 인지에 대하여 공감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구절을 적용하면 이렇게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흔적들은 무궁무진하였다고.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 눈에 들어온 영어성경 번역이 있었습니다.

NLT 성경 갈라디아서 6:17절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From now on, don't let anyone trouble me with these things. For I bear on my body the scars that show I belong to Jesus.”

직역해서 말씀드립니다.

지금부터 이러한 일로 인하여 아무 누구든지 나에게 곤란함을 입히려고 하지 마십시오왜냐하면 나는 예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흉터들을 내 몸에 새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감동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스티그마타’ 즉 흔적들의 정체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을 여기에서 찾습니다.

 

⁜ 바울의 스티그마타는 예수께 속해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이 흉터가 언제 생겼습니까?

예수 때문에 다쳤을 때입니다.

예수 때문에 피해를 입었을 때였습니다.

사도행전 14:19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갈라디아의 한 지역이었던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당했던 린치에 대한 기사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를 주의 능력으로 고쳐주었다가 인기가 급상승했던 바울이 근교인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넘어온 유대인들의 중상모략으로 급반전되어 돌로 바울을 쳐서 실신하자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장사를 지내려고 할 때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한 장면을 의사 누가는 자기의 의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상세히 사도행전 14장에 적시해 놓았습니다.

이 기사를 소개한 이유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4:20-22절에 주목해 주십시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맨 처음 이 구절을 만났을 때충격의 충격이었습니다.

누가가 무엇을 보고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거의 죽음에 가까운 폭력을 당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돌에 맞는 린치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절의 보고에 의하면 바울은 거의 죽음 직전의 상태까지 가는 데미지를 입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의 장사 법에는 죽은 자를 성읍 안에서 장사를 치르지 않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신이라고 생각했던 바울의 육체를 루스드라 성읍 밖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이 정도면 바울이 당한 육체적 데미지는 재론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타격이 심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직은 할 일이 많은 바울은 다시 소생했습니다.

소생한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돌로 인해 으깨진 육체를 치유하는 일이었습니까?

상식적으로 그게 먼저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의사 누가는 치료에 대한 기사를 보고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치료의 과정이 없었다는 산 증언을 한 셈입니다.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돌을 던져 살해하려고 했던 그 무시무시한 자들이 있는 루스드라로 다시 들어갔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바울에게 돌을 던진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맨 처음부터 바울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 고향 친구를 걷게 해준 바울에게는 헤르메스라는 칭호를동역자인 바나바에게 제우스라는 호칭을 붙이며 신으로 추앙할 정도로 두 사람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도록 충동질을 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출정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까무러칠 정도로 놀랄 일은 바울이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이끌고 다시 루스드라 성읍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은 것과 더불어 원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들어가서 다시 죽기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역을 소개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자기의 멘토였던 바로 그 바울이 죽음과 광기의 도시였던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남긴 사족을 누락시키지 않고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14:22절을 복기하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흉터 즉 스티그마타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수 없이 많은 SCAR 즉 흉터가 바울에게 새겨지면 새겨질수록 그에게 더 깊이 확인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the scars that show I belong to Jesus.”

내가 예수께 속해 있다는 흉터 즉 소속감이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의 걸작인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당신의 사도들은 세상에 살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악한 행동을 하거나 남을 속이지도 않았고겸손하고 소박했습니다그들은 당신 때문에 비난 듣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세상이 비웃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토마스 아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유재덕역브니엘, P,140,2016)

적어도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들의 신앙 선배들은 고난역경환란폭력 당함배교의 강요 등등을 당할 때마다 도리어 그런 일체의 고통들로 인해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확실한 소속감을 더 강화시키는 스티그마타로 승화시켰습니다.

소그룹을 인도하다보면 지체들에게 적지 않게 듣는 곤란함의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밝힐 수 없는 상황적인 난처함의 호소입니다.

평생을 목사로 살아온 나이기에 또 다른 세속의 지경에서 삶을 살아온 여러분의 곤란함을 십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어제 저녁 운동을 나갔는데 운동 중에 아주 열심인 여성 회원들이 운동 중간에 평상복으로 구장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끼리 모여서 술 한 잔을 한 듯했습니다.

말꼬리가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치들이 너무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평상시에 참 얌전하게 보았던 여성 회원의 입에서 내 뱉어지는 내용이 듣기에 민망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고더불어 행동하는 행위들이 보기에 민망하였습니다.

게임을 마치고 그녀들이 있는 쉬는 룸으로 동성을 옮겼는데 갑자기 그들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저에게 얼굴이 시뻘게 진 회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저희들 저녁 식사하고 왔습니다다른 일은 안 했습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뭔 다른 일누가 묻기라도 했나!”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나 때문에 주변이 정화되는 삶입니다.

여러 차례 교우들에게 소개한 오래된 새 길에 수록된 한 대목을 다시 복기하고 싶습니다.

나는 저 멀리 벵갈 바다 짙푸른 바다를 안다어느 곳에서는 바다의 짠물을 뚫고 민물이 솟아 나온단다뱃사람들은 먼 바닷길에서 물이 떨어지면 그곳으로 가서 물을 마시게 된단다그래서 뱃사람들은 그 물을 도솔천(兜率川)의 물이라고 하고생명의 물이라고도 한단다.”(김기석오래된 새 길,포이에마,P,68,2012)

이 글을 처음 만나 읽을 때왠지 모를 영적인 자존감 즉 주존감 때문에 눈물이 글썽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래야 합니다.

도솔천과 같은 삶 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 세인 공동체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레테르를 갖고 사는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혹시 지체들이 좋을 때만의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싶어 교회를 목회하며 섬기는 저는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혹시나 나에게 예수 때문에 흉터가 생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자가 세인 공동체에 더 많을까봐 몹시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5:41절에서 이렇게 말했는데 우리는 혹시 그 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떨립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예수 때문에 당하는 상처 즉 스티그마타는 합당한 일인데 억울한 일로 변질될까 봐 몹시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에는 진짜로 스티그마타가 있습니까?

단테가 신곡 천국 편을 시작하는 제 1곡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이제 내 마음이 보물로 간직한 하늘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영역은 내 노래의 줄거리가 될 것이다.”(단테신곡-천국 편세계문학전집 150, 민음사,p,7)

나는 이 곳은 적어도 스티그마타가 있는 자가 갈 수 있는 영역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내가 호흡하는 동안 스티그마타를 진하게 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 때에

시험과 환란 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 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후렴)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 인도 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