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42번째 강해) 본문 : 갈라디아서 6:15-16 제목 : 중심에 서 있습니까? 서론)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이신건 박사님이 현직에서 은퇴를 하고 양평에 내려와서 은퇴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기 목사 한 명과 지난 주 화요일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선배는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해서 제일 젊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에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은퇴를 한 성결교단의 수재입니다. 참 배울 것이 많은 교수이자 선배이신 이 박사님을 만나 참 오랜 만에 선후배간의 정을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대화중에 이 박사님과 동기 목사 간의 바울 서신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선배는 상당히 진보적인 조직 신학자답게 바울 서신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1장에 기록된 여성 차별적인 발언 등은 대단히 잘못된 바울의 실수라고 지적하면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바울은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였고 그러기에 주관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학자의 날카로운 비평을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선배의 지적에 같이 간 동기 목사가 발끈했습니다. 바울이 주관적으로 글을 썼다는 비평적인 성찰을 내놓는 선배에 대하여 불편한 심정을 피력한 것입니다. 해서 동기 목사는 이렇게 반론을 던졌습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분명히 오류가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서신서는 정경이기에 선배가 말하는 비평적 성찰은 해석의 문제일 뿐 바울 서신의 정경성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친구의 지론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서신은 바울이라는 인간이 썼지만 그가 쓴 책은 ‘교회의 책’(A BOOK OF CHURCH)이기에 바울 서신에 대하여 너무 정경적인 비평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치열한 논쟁의 이야기를 듣다가 저는 그날 인사차 찾아간 선배이지만 친구가 주장하는 내용에 정서적인 동의를 했고, 선배에게 조심스럽지만 이것이 아마도 신학자와 목회자사이에 있는 긴장감이고 좁혀지기가 쉽지 않은 간극인 것 같다고 에두르며 그 대화를 조마조마하게 마쳤습니다. 이 경험을 하면서 나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도 참 골치 아프시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느 한편에 대하여 손을 들어줄 수 없으시기에 말입니다. 동시에 또 한 편으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셨을 텐데 어쩜 둘 다 맞지 않는 말만 골라서 하니? 라고 답답해하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하셨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교회라는 공동체에 대하여 적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교회 공동체 현장에서도 많이 마주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일이 교회 공동체 안에는 무궁무진하다는 점입니다. 지난 월요일, 협성대 신대원 학생들 세 명이 우리 교회를 인터뷰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그들의 질문한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목회 철학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있고 대통령 선가 때가 되면 정서적으로 그의 정치 철학에 동의하여 투표하는 후보자가 있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는 극도로 조심한다. 우리 교회는 자유한국당 고문으로 있는 성도가 있고, 참여연대에 관계하는 대단히 진보적인 성도가 있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전 법무부 장관인 조국의 사퇴에 대하여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조국 사퇴에 대하여 가슴 쓸어내림으로 안타까워하는 성도도 여럿 있습니다. 그게 교회다. 그러기에 교회는 균형을 잡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지난해에 지금 정권에 대하여 단체 톡을 통해 공산주의자라고 천명해서 선동하던 자매가 있었다. 해서 수차례 경고했는데 듣지 않고 스스로 교회를 떠난 성도가 있다. 붙잡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교회 밖에서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대중적으로 정치적인 선동이나 표시하는 일에 대하여 강력하게 제재한다.” 교회 안에 이런 극단의 경우가 줄곧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자들과 함께 가는 것이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할 수 있는 바로미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기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 또한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열조에게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음을 알고 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를 불러 리더십을 인계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여호수아 1:7절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바로 이 대목에서 교회와 성도가 지켜야하는 교훈을 찾습니다. 우로 아니고 좌도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혹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이유나, 좌도 치우치지 않는 이유가 줏대가 없거나 눈치를 살피기 위해서라면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이유가 본말이 전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 사람은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중심주의자이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선언한 메시지를 통해 교우들과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우리는 그 동안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서 할례가 구원의 조건임을 내세우며 교회 공동체를 유린한 할례주의자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토하며 경고하였던 바울의 행동을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익숙해져 있는 또 하나의 관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무할례에 대한 해석입니다. 할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난 자들에 대한 경고가 너무 강력해서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바울이 옹호한다는 생각을 자연적으로 갖는 교우들이 여기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무할례자들을 칭찬하거나 그들의 편에 섰던 적은 없습니다. 바울이 지지하고 응원하였던 자들은 무할례자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며 할례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할례는 물론 무할례 자체에도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진짜로 강조하며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본문 15절 하반절에서 분명히 천명합니다.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 오늘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날마다 새롭게 지음 받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은 바울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이유 때문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것은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바울의 최대 관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천착해야 하는 중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왜 중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14절에서 세밀하게 살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 14절을 근거하여 설교를 통해 분명히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러 돌아가신 주님으로 인해 주님이 불편해 하시는 이 땅에서의 모든 것에서 뒤돌아서는 것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체의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첫째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이유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를 나도 짊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기 때문임을 지난 설교를 통하여 분명히 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의 내용을 본문 16절과 연관하여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규례(RULE)를 행하는 자라고 했는데 도대체 규례가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규례에 대하여 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십자가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할례에서 떠나는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맥에 따라 ‘규례’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이 불편해 하시는 일체의 것들에서 떠나는 삶과 동시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고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며 살아가는 즉 날마다 새롭게 지음을 받는 삶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은혜를 하나 찾아낼 수 있습니다. 16절에 번역된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면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두 개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헬라어 원어 성경을 직역하면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원어 성경을 보면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동격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그래서 영어성경 NIV는 이 대목을 의미 있게 번역했습니다. Peace and mercy to all who follow this rule-to the Israel of God. 이 두 개념의 단어를 ‘–’ 으로 연결해 줌으로서 동격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 해석이 왜 중요합니까? 이제 이강덕 목사의 해석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전적인 해석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의미합니다. 여타 다른 이방인들에 대하여 전혀 개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 전부를 포함하는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하면 폐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개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제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보편성이 누구에게까지 미친 것입니까? ‘새롭게 지음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세상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재탄생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불편해 하시는 일체의 것들에게서 떠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그 삶을 살아내려고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 지난 주간, 크리스천 연합신문 53번째 기고문을 전하면서 담당 기자에게 이렇게 사족을 달아 전했습니다. “아무개 기자님, 이번 53번째 기고문은 어쩌면 마지막 기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글에게는 명성 교회의 세습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글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보수적인 신문 기자이기에 제 글을 싣기가 불편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하지 말고 자간 하나 고침 없이 그대로 게재하는 것을 전제하여 글을 보냅니다.” 이번 호가 제 기고를 실어야 하는 주간인데 싣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잘린 것 같아 보입니다. 괜찮습니다. 기고문을 전하는 것도 너무 힘든 사역이었는데 저를 도와주는 것이기에 은혜로 받을 생각입니다. 저는 수구적이고 말이 안 통하는 극단적인 보수적 교회에 대하여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면,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 극단적인 정치적 진보교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교회를 홈페이지로 방문하여 섬기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으면 복음을 빙자한 사회주의적인 선동의 장이지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매우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왜 어느 교회는 우측에서 옴짝 달싹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어느 교회는 좌측에서 꼼짝하지 않을까요? 나름대로의 변론을 내놓겠지만 별로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거의 궤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짊어지심이라는 이 위대한 영적 혁명을 그 안에 있는 지체들의 삶에서 새롭게 지음 받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서 이탈하면 교회는 정치적인 집단으로 발전되든지 아니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 변질됩니다. 교회는 중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지음을 받아가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분명한 중심에서 결코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16세기 위대한 영성을 남기고 떠난 아빌라 테레사는 그의 걸작인 ‘내면의 성’에 두 번째 성채에서 본 영적 조명을 이렇게 무게감이 있게 남깁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우리 안에 사시는 새 생명을 바라보라. 그분처럼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분에게 가르쳐 드리려고 주제넘게 그분에게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다.”(아빌라 테레사, “내면의 성”, 요단, 2011년,P,91)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가끔 이런 아픔에 젖어들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에 맞추어 따르도록 압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픔 말입니다. “이게 주님 맞는 일입니다. 그러니 주님도 따르세요.” 너무나 불손하게도 이렇게 주님에게 충고하고 가르치려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교회에서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여 못내 슬프고 유감스럽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날마다 짊어지며 그 분이 원하셨던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들이 행하며 살아가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왜?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다시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며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