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6:11-13
제목 : 겉멋 들지 맙시다.
서론)
유대인 철학자이지 교육학자인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원본’으로 태어났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사본’의 삶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이 글을 읽다가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의 답을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아마도 군중들은 소외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라는 나름의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어느 그룹에 속하여 있다는 것은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익숙하다보면 절대로 사람은 창의적이 될 수 없을뿐더러, 자기 발전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많이 퇴보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 말한 대로 조금은 외롭고 힘들어도 ‘나는 원본이야!’라는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마음가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말 위대한 삶을 살아내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구원 그 이후 반’에서 나눈 존 오트버그의 ‘예수는 누구인가?’ 제 8과는 예수께서 얼마나 독창적인 삶을 살아내셨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였기에 그 중에 참 중요하게 다가온 내용을 전 교우와 함께 잠시 나누기 위해 소개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던 대 로마제국에 대하여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던 유대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로마제국에 대하여 무력을 저항하는 분파인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배자인 로마와 맞서 무력으로 저항한 극단적,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교하면 아마도 지금의 정부와 보수적인 야당과 치열하게 해석에 대한 의견 대립을 하고 있는 김원봉의 의열단 정도일 것입니다.
열심당들은 할 수 있는 일체의 방법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동원하여 로마와 대적하는 행동을 보인 부류입니다.
둘째로는 에세네파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들은 당시 정치 세력들이든지, 종교 세력들이든지 심지어는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일체의 아류 세력이든지 그들은 저주 받은 사탄적인 그룹이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에 치욕을 느껴 쿰란 동굴과 같은 비밀스러운 아지트에서 구별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금욕적인 경건 훈련을 하던 회피주의자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타협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던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로마와의 싸움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차라리 로마에게 충성을 하며 종교적인 기득권을 다 차지한 기생충과도 같은 부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유대 분파들에게 공히 예수님은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가르침과 삶을 사셨습니다.
열심당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에세네파를 향하여서도 삶으로 저항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곱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공생애 대부분을 창녀, 세리, 병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은둔하며 그곳을 피난처 삼아 살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삶으로 반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두개파에 대하여는 더욱 강력하게 반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21절 후반절은 로마 권력을 물론 거기에 기생충처럼 빌붙어 살던 사두개파에 대하여 폭탄을 던진 메시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사두개인들이 인정했던 로마 정치권력과의 야합에 대하여 가이사는 주가 아니며, 그가 전부도 아니며 그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 있음을 분명히 선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주후 1세기는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식민지 국가였습니다.
로마라는 대 제국에 의해서 통치 받던 아주 볼품없는 약소국가였습니다.
이 때의 가이사는 절대 황제였고, 살아 있는 신이었습니다.
다른 종류의 신을 인정하는 것은 곧 반역이었고, 불온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살벌한 시기에 예수님은 로마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항한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의 권력을 잡고 있는 가이사에게 바칠 것이 있다면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이 발언은 목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것이 절대 1인 독재자인 황제의 것만 통용되고 해석되는 이 시기에 황제의 것이 아닌 것도 있다는 대단히 불온한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종합하면 주님은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모드로 보면 불온분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 모드로 평가한다면 주님은 자신의 길을 가신 분이라는 감동이 여겨지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대중적인 여론에 좌지우지 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요즈음의 언어로 객설할 때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가신 길을 오늘 본문의 메시지와 연관하여 교우들과 함께 오늘의 이야기로 나누어 보려 합니다.
본론)
본문 12-13절을 읽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신 거의 끝자락인 오늘 본문에서 그토록 앞선 장에서 치열하게 쟁론했던 할례에 대한 담론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무엇이라 말하며 다시 할례 논쟁을 복기하고 있습니까?
12-13절에서 해석자인 제가 발견하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1) 십자가를 피하기 위한 비겁한 행동이라는 지적입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무슨 말입니까?
할례를 강조하던 할례주의에 함몰된 거짓 교사들이나 그들의 거짓 복음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나 상관없이 이들은 공히 십자가의 부담을 피하려는 비겁한 행동을 한 자들이라고 바울은 서슬이 시퍼렇게 공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할례는 십자가라는 영적 부담을 면피하려는 보상적 대안이었다고 말함으로서 할례주의자들에 대해 바울은 비난한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이 내용은 2000년 전, 갈라디아 지역에 살고 있었던 교회 안의 회색주의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셨던 삶 자체에 대하여 적지 않은 부담감을 갖고 할례를 선택했던 자들에게만 주어진 메시지가 결코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피하기 위한 비겁한 행동으로 선택한 요소가 할례라는 이 비수는 적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같은 목사와 여러분과 같은 신자들에게 더 크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1-22절을 읽겠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주님의 멱살을 붙잡고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협박한 이유는 베드로에게 관심은 천국열쇠였기에 결코 예수가 십자가에서 개죽음을 당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겉멋 신앙의 폐부를 주님께서 알고 계셨기에 베드로에게 핵 펀치를 주님이 날리셨습니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16:23-24절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겉멋 들려 있는 베드로에게 강펀치를 날린 셈입니다.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주님의 이 펀치가 날려진지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작가 유시민이 금년 7월에 정치색에서 자유로운 책을 하나 출간했습니다.
유럽도시기행(1)입니다. (도서출판 생각의 길)
그 책 안에 있는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바티칸 정원의 솔방울 조각상 앞은 인기 포토 존이었다. 교황의 여름 궁전 안마당은 대리석 조각과 부조가 가득했고, 여름 궁전과 대성당 사이에 놓인 회랑 벽은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걸어서 3분이면 대성당에 갈 수 있는데 교황이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이 회랑을 만들었다니, 광야와 장터를 걸어 다녔던 예수님이 알면 뭐라고 할까 궁금해 졌다.” (p,145)
주님이 선포했던 겉멋 신앙에 대한 호통을 무색하게 하는 그 겉멋 종교가 전 세계 최고의 가톨릭 성지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셈입니다.
기독교의 정수는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따라가는 내 삶의 진정성입니다.
2) 겉멋 종교는 껍데기 신앙임을 본문에서 알려줍니다.
본문 13절을 다시 봅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눈에 거슬리는 표현입니다.
“육체를 자랑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는 육체 지향적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영혼 지향적입니다.
헌데 할례주의자들은 적어도 구원을 받은 자의 절대적인 표식을 육체적인 구별됨으로 한정하는 누를 범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할례주의자들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
공동번역은 이렇게 이 부분을 해석했습니다.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
표준 새 번역도 오늘의 언어표현으로 더 어울리는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
적어도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자른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특권의식은 말 그대로 외형주의의 발로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도리어 그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진의를 정면으로 무시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사무엘상 16:7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를 적시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용모와 키 즉 외모를 중요시 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중심에 집중하는 종교입니다.
‘중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바브’는 직격하는 단어로 바꾼다면 ‘마음’ ‘심장’입니다.
인간의 심장이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레바브’를 외면시하면 그건 기독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읽었던 너무나 유명한 성경 구절이 계속해서 여운에 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을 소개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군으로 삼은 뒤에 그의 용모, 외형, 겉멋을 날마다 죽였고 또 죽이고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NOT A FAN’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진 카일 아이들먼 목사는 ‘나의 끝, 예수의 시작’이라는 책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죽은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죽은 사람들은 자신의 옷이 얼마나 멋지고 예쁜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중략)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바로 이런 상태를 염두 해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에 대하여 죽고 우리도 그것에 대하여 죽는 것을 말한다.”(P,218)
카일 아이들먼은 이 글을 기록한 자신의 책 제목을 그래서 ‘THE END OF ME’라고 정했던 것입니다.
제가 조금 부연하겠습니다.
카일 아이들먼은 ‘나의 끝’에서 멈추었지만 번역자의 의도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The end of me means the starting of my Jesus Christ.라고.
겉멋이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의 끝을 인정하지 않고 육체적인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껍데기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합리화하지 맙시다.
“목사님, 나도 알아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성경 시대의 일이지 오늘은 불가능해요. 그냥 알고만 있을 게요.”
직격합니다.
그게 껍데기 신앙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에서 머무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에서 머무는 종교가 아닙 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께서 말씀하신 명제를 살아내는 종교입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 11절을 읽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갈라디아서 1:1-6:10절까지는 바울의 지지자이자 동역자인 누군가가 바울이 말한 내용을 받아 적어내는 형식으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그런데 11-18절은 형식이 바뀝니다.
이 단락부터는 바울이 직접 썼다는 말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⓵ 당시에는 위조품이 많았던 시대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의 진짜 작품임을 증명하는 사인이 담겨 있는 글임을 밝힌 것입니다.
⓶ 큰 글씨라는 대목에서 가슴 뭉클함이 전해지는 데 시력이 안 좋았던 바울이기에 너무나 중요한 마지막 단락만큼은 크게 쓰면서 강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 살필 14절을 바울은 매우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겉멋 신앙에 함몰되어 있습니까?
껍데기 신앙으로 살아왔습니까?
돌이키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회복하십시다.
바울이 큰 글씨로 썼던 이 대목을 저는 여러분에 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의 머묾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는 속멋 신앙인으로 다시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의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