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그래도 끝까지 잘 심어야 합니다.2024-02-28 17:10
작성자 Level 10

2019년 10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9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6:7-10

제목 그래도 끝까지 잘 심어야 합니다.

 

서론)

 

교수님이번 학기 교수님의 목회리더십을 수강하고 있는 학생입니다매주 열강에 감사드립니다어제 저녁에 교수님의 주일 예배 설교 말씀을 유튜브로 함께하였습니다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그리고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가르치는 자가 올바르게 가르치도록 성도들이 경계하는 것과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예의를 지키라는 권면의 말씀이 이 시대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얼마나 가치 있고 필요한 일인지를 깊이 깨닫는 은혜와 도전의 메시지였습니다월요일은 좀 쉬시는 시간이 있으신지요바쁘시더라도 건강 잘 챙기시길 기도합니다낼 뵐게요참 좋으신 교수님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아무개 드림.

제자의 글을 받고 기뻤던 것이 아니라 너무 미안했습니다.

혹여 이렇게 표현한 제 발언이 립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면 그것은 그 분들의 수준이기에 다시 설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제자의 글을 받고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지금 제가 강의하고 있는 클래스에 등록하여 수강하고 있는 학생들은 야간 신학대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이기에 제일 먼저 고려할 것은 육체적으로 결코 편안한 상태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6학기 째 즉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녁 시간을 바쳐 공부에 올인 하고 있는 주경야독의 주인공들이기에 대단히 곤비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불어 이들은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경제적인 면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job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공부만하는 전업 학생들은 극소수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수고가 얼마나 클지 재론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런 표면적인 이유만으로도 저는 학생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역량과 최선을 다해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또 그들에게 적어도 실망을 주는 선생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지금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앞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종들인데 학생들이 나아가야 하는 현장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비극적인 정글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붙잡고 싶은 데 진짜로 붙잡을 만한 영적인 거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들이 결국 같이 동역해야 하는 한국교회라는 현장은 편법이 횡행하고 천민자본주의의 폐해의 가장 심각한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기막히게도 더 살벌하게 나타나는 현장이기에 교회의 작금의 현실은 풍전등화와 같은 아슬아슬함이 있는 위기의 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회적인 철학과 신학적인 주관이 설정되기까지는 그 누군가의 목회와 신학적인 면면들을 현장에서 벤치마킹을 하며 따라가야 하는데 그 선배들이 보이지를 않는 캄캄함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위로하며 장밋빛 청사진을 제공하고 목회도 긍정의 힘을 갖고 달려가면 반드시 성공하는 목사가 될 것이라는 거짓된 증언이 아니라 진짜 예수의 길을 가고 있는 선배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예수께서 감당하셨던 정의와 공의의 메신저가 되는 목회 선배와 교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봐도 그런 류의 교회와 선배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이 그들을 옥죄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지난 주 한 학기 강사로 만난 선생의 교회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듣고 상당히 불편한 설교였지만 목사가 상투적으로 내 뱉는 설교가 아닌 아픔을 같이 공유하는 설교로 받아 주었기에 저에게 소개한 문자를 보낸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는 제자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저는 1992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90년부터 이미 제 개인의 단독목회를 해 왔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너무나 황송하고 송구한 은혜를 받은 목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제 선배들이 한국교회를 위해 눈물로 씨를 뿌렸다는 은혜를 받은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목사진보적인 목사 예외 없이 제 선배들은 국가와 사회와 교회를 위해 씨를 뿌렸습니다.

제 선배들이 사역을 하던 한국교회는 두 개의 가교가 함께 공존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는 보수적인 스펙트럼 안에 있었던 선배 목회자들입니다.

이들은 가난에 찌들려 있었던 민초들에게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함으로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는 희망의 씨를 뿌렸고 그 결과 이들이 섬겼던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사회가 이만큼 도약하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진보적인 스펙트럼 안에 있었던 목회자들입니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사회가 군사 독재라는 절망의 시대에 있었을 때수많은 고문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중단하지 않음으로 이 사회가 민주화 사회가 되는데 일익을 감당했던 씨를 뿌려준 선배들이었습니다.

이 두 선배들의 씨 뿌림의 수혜를 받은 자가 바로 저라는 점에서 그냥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신학도들에게 저는 너무 미안한 선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후배들에게 열매로 남겨줄 씨앗은 고사하고 저들이 헤쳐 나아가야 할 무거운 짐만을 남기게 된 선배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클래스에 들어와 그래도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데 남겨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실은 너무나 창피하고 속이 상합니다.

심었어야 무언가를 줄 수 있는데 심은 게 없으니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그 죄책감 때문에 수업 시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나름 최선을 다하려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지금도 목회를 하면서 나는 무엇을 뿌렸는가를 되돌아보고또 앞으로 무엇을 뿌리는 목사로 살 것인가를 매우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목사인 저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본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시에 설교를 듣는 교우들에게도 정말로 가슴에 담지 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제시하는 본문입니다.

 

본론)

 

본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서신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촌철살인을 남깁니다.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울은 이렇게 대 전제를 하며 선언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간에 그 심은 것을 토대로 그대로 거두게 된다고.

이것처럼 명확한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연의 법칙은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것이고팥을 심으면 팥이 나게 하는 것이 법칙입니다.

이것을 순리라고 말합니다.

금년에 이 땅에는 역대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의 수와 같은 숫자의 태풍이 몰려왔습니다.

북태평양의 바닷물 온도가 29도에 육박하는 지구온난화의 결과물이 태풍을 빈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사람들이 심은 욕심이라는 씨앗을 심은 불행한 결과물이 그대로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충격을 받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마존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터를 개발하려는 문명주의자들이 개발 명목으로 원주민들에게 보상 물질과 식생활의 풍요로움을 주는 장명 후의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 보상을 받은 한 부족 전체가 불과 5년이 안 되었는데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에 걸렸고 그 결과 그 마을 전체에 죽음의 공포가 휩쓸고 있는 실상을 방송한 내용이었습니다.

정말로 아마존 부족들에게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고혈압당뇨 환자들이 속출하고 그로 인하여 조기 사망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비극이었습니다.

역시 욕심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무지했던 아마존 원주민들은 그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절대 명제가 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명제입니다.

본문 7절의 문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다시 7절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표명한 이유는 잘 심으라는 속뜻이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 대목을 이 구절에 같이 담아 놓았습니다.

잘 심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 심는 것이 절대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임으로 결국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의미입니까?

잘못 심는 행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가 된다는 말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이제 조금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접근해야 하겠습니다.

그 답을 8절이 아주 명학하게 제시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일체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역설하면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행위는 반드시 썩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존중하는 씨 뿌림을 바울인 대조적으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이렇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얻게 될 복을 바울은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대조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코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리거나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삶을 명령하면서 본문 9절에서 이 삶의 행위가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님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구절에서 이라는 대표적인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칼로스를 저는 더 잘 애용하는 의미로 다르게 번역합니다.

똑바름’(righteousness)입니다.

성도가 참 하기 어려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말로는 대단한 쉬운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똑바름입니다.

우리가 똑바르게 살되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때가 되면 반드시 그 똑바로 산 것에 대한 열매를 거두게 된다고 본문 9절을 해석하면 적절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이 교훈을 전한 바울은 본문 마지막절인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함으로 본문 단락의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저는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착한 일을 똑바름이라고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똑바름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실천해야 하는 일임을 바울은 역설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본문 단락 해석입니다.

이제 해석을 통한 영적 교훈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똑바로 사는 것교회가 똑바로 사역하는 것목사가 똑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일까요?

반대로 성도나목사나교회가 똑바르게 살지 못한다는 말이 또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풀어야 하는 숙제입니다.

 

1)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 똑바르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앞선 본문 주석을 통해 살폈듯이 이 테마는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가 되는 것이요반드시 썩는 것을 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행위즉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 행위는 오늘 우리 시대의 표현으로 무엇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요?

 

⁜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일체의 행위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교회를 무너뜨렸던 무기가 할례 준수요 율법 지키기였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이것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분명한 저의는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적인 주도권이었습니다.

바울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된 유대적인 종교의 헤게모니 회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잃어버린 교권을 다시 찾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아주 질 나쁜 사탄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들춰보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았던 일체의 무리들은 언제나 그 저의가 사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스라엘 광양 공동체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기사가 실려 있는 텍스트입니다.

바로 이 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구절을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32:1절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을 압박했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말한 명분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위하여였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이 해괴망측한 일을 행한 장소는 시내산 밑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모세는 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동체가 광야에서 시작하여 가나안 입성에 이르기까지 선민 공동체가 지켜 나아가야 할 10가지의 법을 부여 받고 있었을 때라는 아주 묘한 상황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10가지의 계명 중에 두 번째 계명에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20:4절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하나님의 데칼로그(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의 대 선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를 위하여입니다.

2계명의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유자이신데 어떤 경우에든지 그 분이 공간에 머물게 되는 그 무언가로 제작되는 순간 하나님의 자유하시는 존재성을 부인하는 꼴이 됨으로 결코 조각하거나 만들지 말라는 신학적 의도가 있는 계명이 2계명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공감에 갇히시지도구속되지도 않으시는 자존자이신데 하물며 하나님의 존재 근거를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허용하실 리 만무임에도 불구하고 시내산 아래 공동체는 이미 하나님을 묶어버리고제한하려는 움직임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송아지는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 버린 욕심 덩어리의 절정이었습니다.

대단히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출애굽기 32:1절에 번역된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는 대목에 표현된 은 분명히 엘로힘’ 이라는 하나님의 표현을 쓰고 있지만 주석가들은 이 때의 엘로힘은 야웨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잡신을 의미하는 엘로힘이라고 격하시킴으로 영어 성경의 대부분의 표현에 ‘GOD’ 대신에 ‘gods’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체의 행위는 반드시 썩어지는 것을 심는 일임을 명심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똑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앞의 해석과 같은 맥락에서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는 일이며그 결과 영생을 거두게 되는 심음임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5:26절에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이 행하실 사역은 주군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성자 예수님의 증언의 영이셨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역할은 주군에 대한 보증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좌고우면하지 않고 집중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내 수단이 아닌 나의 목적으로 삼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저와 여러분의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참 의미 있게 다가와 저에게 부침한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7:5-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은혜로 신 광야의 길목인 르비딤 골짜기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그곳 역시 물이 없자 이스라엘 공동체는 모세를 원망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와 다투는 정도까지 극단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동안 우리를 인도한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나님께 반기를 들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소위가 괘씸하셨지만 모세를 들어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산에 있는 반석으로 나아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반석을 네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로 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하면 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해 주셨고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다고 성경은 보고합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저와 여러분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주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내용 중에 네가 나일 강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를 가지고 나가라고 명하신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팡이는 또 다시 르비딤 반석에서 물을 내는 도구로 사용하실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보고 그대로를 교우들에게 적용하여 설명하다면 그 지팡이는 결국 물을 내는 귀한 도구가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마음을 먼저 주는 동물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 역시 이럴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충분히 있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그의 사역을 승리로 만드는 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을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그 지팡이를 자기 사역의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보고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단한 감동을 받습니다.

모세가 사용한 지팡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데 사용했던 수단이었지 그 이상이 아니었음을 모세는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에게 있어서 그가 바라보았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모세의 목적은 하나님이셨다는 점입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모세였기에 그는 훗날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31:6-8절을 봅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지난 주간광화문에서 지금 정권에 반대하는 대 규모 집회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색깔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 체계 하에서 얼마든지 자신들의 의견을 집단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일이기에 집회를 여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간 그 집회에서 나온 한 가지의 촌극은 목사로서 좌시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잠시 언급하려고 합니다.

그림 하나를 잠시 보겠습니다.

 

교회 성직자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 자체가 제 신학적 판단으로 0,1%도 동의할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 정치판에 여러 가지 모로 구설수에 오른 한 목회자의 행보에 대하여 개탄해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사람이 또 치욕적인 작품을 만들어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엽기적인 일을 보란 듯이 보여 주었습니다.

본 헌금은 아무개 목사의 모든 사역을 위해서 드려지며 헌금의 처분 권한을 아무개에게 위임합니다.”

개그콘서트에서도 볼 수 없는 코미디입니다.

중세 가톨릭이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indulgence’ 사건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면죄부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으로 삼는 자의 수치스러운 행태의 극치를 보면서 얼마나 유감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곳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스프랑클니조마이의 심정으로 그 영혼을 위해 중보하고 최선을 다하는 곳입니다.

그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를 목적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100% 확신하며 이 사역에 목숨을 거는 곳이 교회입니다.

목사는 이 한 가지 사역을 위해 선두에 선 자입니다.

이것은 나의 주군이신 하나님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입니다.

사람에게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불의의 돈을 갹출하는 작태가 백주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이 개신교 목사에 의해 자행된다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엄청난 대규모 성당 건축을 위해 수없이 많은 돈을 쏟아 부었던 서구 유럽의 성당은 예배하는 자가 찾아가는 하나님의 집이 아닌 구경하는 자들로 넘쳐나는 관광지가 되어 버리는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고 그렇게 씨앗을 뿌리고 심었던 자들로 인해 나타난 참극이라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체의 사역은 나를 위한 사역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사역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똑바로 심는 일이며 성령을 위해 심는 일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잘 심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만이 목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도엘리야도 아닌 예수님만이 목적인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에게 들린 소리와 마지막 환상을 마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마가복음 9:7-8절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

피곤한 내 영혼 위해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