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목요일) 묵상 – 사순절 열다섯 번째 날 봄이 근처에 있네요.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95편, 출애굽기 16:1-8, 골로새서 1:15-23 꽃물 (말씀 새기기) 출애굽기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마중물 (말씀 묵상) 그렇다. 인간은 과거지향적인 존재인 게 맞는 것 같다. 언제나 추억하는 존재이니까.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면 그때가 왠지 모르게 그리워진다. 첫사랑을 추억하면 그 사랑은 싱그럽다. 미성숙 되어 있었던 때였지만, 그때의 행복은 그래도 썩 괜찮은 과거였다는 결론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다. 노예로 있었던 때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먹는 문제였다니 조금 심하다. 아무리 과거 추억에 대한 점수 매기기를 후하게 하더라도 이건 선뜻 좋은 점수를 주기가 거시기 하다. 인간은 자유를 먹고 사는 존재다. 결국 구속되어 있는 자아 자체는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 구속 상태가 소위 말하는 대로 황제 구속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인간의 기본권을 말살한 것이기에 편하지 않다. 헌데, 고기 가마 곁이 그리워 애굽에서의 노예 시절을 애달파 하다니 이해 불가다. 아주 오래전, 위대한 명작 ‘쇼생크 탈출’을 감상했을 때다. 나는 레드로 분한 모건 프리먼이 40년 형기 즈음에 가석방이 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생계를 위해 잠시 일하던 직장에서 화장실을 갈 때 주인에게 허락을 받으려는 학습된 기제를 보면서 자유 박탈이라는 인권 유린의 행위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폭력적인 행위인지를 간접적으로 느꼈다. 반면, 이 영화의 끝 부분에 앤디로 분한 팀 로빈슨이 레드에게 석방된 뒤에 멕시코로 나를 찾아오라는 메모를 남긴 양철통에 담겨 있던 대사는 영화를 보면서 나를 울게 했던 가장 강력했던 은혜로운(?) 대사였다. “레드. 희망은 좋은 거예요. 아마 가장 좋은 것일 수도 있어요.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거든요.” 가장 동물적이고, 본능적이며, 형이하학적인 비극은 희망과 바꾼 육욕적으로 사는 삶이다. 시내산을 불과 얼마 남겨두자 않은 지점에 도착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반면교사를 삼아본다. 두레박 (질문) 오늘 내가 만지고 보는 것이 희망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육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경향은 내가 평생 싸워온 괴물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주님,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이 이기게 해주십시오. 그러려면 주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 필수입니다. 이건 절박한 간구입니다. 나비물 (말씀의 실천) 나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주님의 자리를 꿰차고 있지 않은지 철저하게 경계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오늘 제천 하늘이 유난히 찌푸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찌푸림은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분명, 청명한 하늘과 명징한 햇빛이 비추겠지요. 아픈 자들이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을 견디게 해 주십시오. 봄이 근처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