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3.09.29 셀 사역2024-04-22 11:5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가고 싶은 가을 단풍 관광지 소개하기 (가 보았던 곳까지 포함하여)  

 
경배와 찬양 (WORSHOP)

● 우리들이 싸울 것은 (350장)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나훔 3:1-7
● 제목 :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1) 왜 니느웨 성읍에 곡소리가 들렸습니까?
● 본문을 중심으로 말해보자.  

2) 니느웨가 당할 비참한 상태를 2-7절을 중심으로 세 가지만 말해보자.
1)
2)
3)  

3) 니느웨가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교훈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1) 설교의 테마를 중심으로 말해 보자. (하나님의 코드)
2) 오늘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싸우는 웃지 못 할 해프닝들을 은혜 차원에서 나누어 보자. 
  (참고 성경 구절: 사무엘상 17:28-30절 참고)  

 
사역하기 (WORK)

1. 교회 중보기도
1) 조별 가을 열린 모임의 효과적 승리와 결실을 위하여
2) 가을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기 (가을 열린 모임, 셀별 심방, 3차 치유수양회, 2차 리더수양회 등등)
3) 대학입시 준비 중에 있는 수험생들을 위한 중보 사역
4) 양육 반과 리더 반의 승리를 위하여
5) 담임목사의 목양 사역을 위하여 
2.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3. 셀 그룹의 지체들을 위한 치유기도 (환우들을 위한 집중기도)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주기도문
7. 파스타 - 준비된 대로
  

 
설교요약 (SUMMARY)
9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요약제목: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 본문: 나훔 3:1-7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무시하고 도리어 하나님과 대적하는 삶을 살았던 앗수르가 하나님과 대적한 결과, 니느웨가 당하는 비극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본문의 시작은 상당히 음습하고 부정적입니다. 1절에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말씀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을 선포할 때 그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예언 양식은 장례식 곡소리를 인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본문에서‘호이’는 우리나라 말의 번역으로‘아이고’에 해당되는 곡소리의 의성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자 나훔은 니느웨 성읍을 가리켜 장송곡의 통곡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죽은 자가 생겼을 때의 비극과 관련하여 화 있을 진저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곡소리에 의거하여 본문을 번역한다면 “아이고,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니느웨의 멸망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시작은 음습하고 침울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맞상대하여 대적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나훔은 큰 소리로 ‘아이고!’ 외친 후에 멸망의 성인 니느웨 성을 향하여 피의 성이라고 선포합니다. 니느웨가 피의 성인 이유는 1절 하반절부터 3절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함이라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말씀합니다. 해석하면 니느웨는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주변 나라들을 공격할 때 전혀 인자함을 베풀지 않고 포악하게 약한 나라들을 유린하며 점령을 한 뒤에는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그들이 공격할 때의 모습은 살벌한 채찍소리가 휙휙 들렸고 병거로 무장한 전차군단의 바퀴소리는 윙윙하며 지축을 흔들었고 날렵한 말들을 이용하여 번쩍이는 칼로 침범하는 나라들의 생명들을 살해했습니다. 창으로 찔러 죽이는 일들은 다반사였습니다. 그 결과 죽임을 당한 자들의 시체가 즐비합니다. 산 사람이 시체에 걸려 넘어질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나훔이 니느웨를 향하여 저들이 힘을 가지고 자행했던 죄악들의 목록을 고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4절에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말씀합니다. 니느웨가 자행한 범죄를 나훔은 마치 마술에 능한 미모의 음녀가 마술을 행함으로 음행을 저질러 주변 나라들을 모조리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 것과 같은 일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훔의 이 고발은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음녀의 마술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자들과 똑같이 주변의 나라들을 그렇게 움츠리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니느웨였기 때문입니다. 1-4절까지는 그래서 니느웨를 향한 나훔의 고발 기사입니다.
그런데 나훔 기자들이 3장을 편집한 진짜 의도는 5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본문으로 제한한 5-7절까지만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말씀합니다. 니느웨는 마술을 걸어 주변 나라들을 유혹하여 망가지게 한 음녀였습니다. 나훔은 니느웨가 바로 음녀라는 단어의 상징적인 의미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음녀가 입고 있는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할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런 뒤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니느웨라는 음녀의 벌거벗은 수치를 니느웨가 괴롭힌 일련의 모든 나라들에게 보이게 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있는 문자 그대로 능욕을 당하게 하고 구경거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무했던 수치를 당하게 해 주기 위함임을 나훔은 피력합니다. 그 결과 휘황찬란했고, 영원할 것 같았고,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니느웨가 황폐했음을 보고 니느웨에 관련하여 빌붙어 살던 모든 무리들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도망하기에 급급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더욱 큰 절망은 니느웨의 이 운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종말을 맞는다는 점입니다. 니느웨의 멸망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애곡하는 자는 전혀 없을 것이며 위로할 자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오늘 본문을 통하여 얻어야 할 영적인 공통분모는 * 싸움은 니느웨와 해야지 하나님과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이 말을 환언하면 싸움의 상대를 잘 골라야 한다는 교훈일 것입니다. 세상에 어리석은 사림은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나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의 몫을 챙겨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알거지가 되어, 죽을 수도 없을 정도의 비참한 꼴을 한 둘째는 결심 끝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둘째는 다시 둘째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첫 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하여 아주 못마땅한 심정을 아버지에게 표출합니다. 누가복음 15:28-30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말씀합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 집에 오자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고 제일 좋은 옷을 갈아 입혔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겨주면서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는 종의 이야기를 듣고 큰아들이 반발한 것입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돕고 있는 큰아들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지 않던 아버지가 동생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표출이었습니다.
큰아들에 대하여 아쉬운 대목은 누가복음 15:28절“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말씀합니다.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큰아들이 보니 집안에서 잔치소리가 들렸습니다. 범상치 않은 소리이기에 집안에서 나는 소리를 종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동생의 환영파티라는 보고였습니다. 큰아들은 순간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반응한 것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은 돌아온 동생에 대한 형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또 하나 큰아들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큰아들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형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큰아들에게로 아버지가 밖으로 나아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간 것입니다. 큰아들의 가장 큰 실수는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않겠다는 것을 빌미로 곧 아버지와 상대하여 싸움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이 비유가 은혜로우려면 동생을 위한 잔치가 큰아들이 분노할 일이었지만 집안으로 들어가 큰 아들로서, 장자로서의 권위를 갖고 세속적인 방탕함, 사탄의 붙들림, 벨리알의 유혹에 넘어진 동생의 죄성 등을 향하여 박살을 낸 뒤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어야 했습니다. 큰아들에게 느껴지는 아쉬움은 싸움의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점입니다. 아버지와 싸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바울 사도의 선포는 에베소서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리석게도 하나님과 싸우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니느웨와 싸우기도 버거운데 아버지와 싸우려고 합니다. 상대를 잘 골라야 합니다. 싸움의 상대를 잘못 골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싸우는 데 집중하지 말고 오늘의 벨리알인 니느웨와 싸우는 세인의 지체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