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3.08.11 셀 사역2024-04-22 11:5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나는 성격적으로 긍정의 사람인가? 부정의 사람인가? 부정적인 면이 있다면 극복 방법은?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7:15-18
● 제목 : 긍정의 반전을 드립시다.
1) 본문 15절에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경배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 미디안 정탐 시에 경험했던 일과 연관하여 설명하라.  

2) 기드온이 하나님께 경배(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영적으로 개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주일 설교의 핵심적 내용을 중심으로  

3) 도마 신드롬과 빌립 신드롬에서 벗어나는 영적인 방법을 달라스 윌라드의 갈파로 적용해 보자.
● 도마 신드롬이란? 빌립 신드롬이란? 달라스 윌라드가 말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는 세 가지의 경우가 무엇인지를 살피자. (담임목사의 설교 중에)   

 
사역하기 (WORK)
1. 교회 중보기도
1) 잃은 양 찾기 5주차 사역이 셀 별로 철저히 진행되어 예비 된 영혼이 회복되도록
  5주차 사역 내용: 맡은 잃은 양과 함께 차 마시며 교제하기
2) 영육의 나약함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우들을 위하여
3) 대학입시 준비 중에 있는 수험생들을 위하여 (곽보람, 신현오, 권용원, 김다인, 배성아, 이태희)
4) 두 날개 양육 1기의 일체의 졸업 과정을 위해서 (졸업 여행, 졸업식: 8월 18일)
5) 9월에 있을 가을 열린 모임을 위한 태신자 미리 정하기 사역을 위하여
6) 담임목사의 목양이 승리할 수 있도록

2.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3. 셀 그룹의 지체들을 위한 치유기도 (환우들을 위한 집중기도)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주기도문
7. 파스타 - 준비된 대로  

 
설교요약 (SUMMARY)
2013년 8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41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7:15-18 / 제목 : 긍정의 반전을 드립시다.

‘예상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비일비재합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아이러니의 예를 살핌으로 부정의 반전이 아닌 긍정의 반전을 위하여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 기드온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강력한 확신과 메시지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100% 확신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마지못해 부하 부라를 데리고 적진으로 정탐을 나갔던 기드온의 찝찝한 순종과 믿음 없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렇게 어이없는 믿음을 갖고 적진으로 뛰어든 기드온은 적들이 나눈 꿈 해몽의 이야기로 뜻밖의 횡재를 하게 된 것을 나누었습니다.(삿 7:13-14절) 기드온의 칼이 와서 자기들을 유린할 것이라는 미디안 병사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드온의 반응은 본문 15절에서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고”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경배하며’입니다.‘경배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솨하’는 원래의 어원적인 의미가‘납작 엎드리다.’의 뜻입니다. 기드온이 뜻밖의 횡재를 하고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행한 일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이 신앙적인 행동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창기부터 기드온에게 말씀과 표적과 기적을 통해 승리의 확신을 주셨고 내가 너와 함께 함께하는 징조로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하게 해 주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드온에게 승리를 확인해 주시고 또 확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확신의 확신을 주셨건만 기드온은 그런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선포했듯이 전쟁에 나아가기 전 마지막 정탐까지 부하 부라를 데리고 내려갈 정도의 불신앙적인 사람이 기드온이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께 불신앙적이었던 기드온이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와 180°로 변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게 된 동기를 보면 13-14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적진으로 들어가 정탐을 하는 어간에 적들의 꿈 이야기와 해몽을 들었습니다. 보리떡 덩어리는 기드온의 칼이고 미디안의 장막을 위로 그 보리떡 덩어리가 덮친 것은 기드온의 군사가 승리할 것이라는 적들의 해석이었습니다. 주석가 랑게는 13-14절의 주석을 “그 꿈은 그 적의 꿈이고 그 해석도 그들의 해석이다.”말합니다. 하나님이 풀어주신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이 들었던 적들의 꿈 해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꿈 해몽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막힌 아이러니와 반전은 기드온이 하나님을 믿지 않던 그들의 꿈 해석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절하며 예배할 정도로 그들의 말을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기막힌 반전을 행한 기드온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난 뒤 비로소 확신에 찬 어조로 명령하기에 이릅니다. 본문 16~18절을 보면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말씀합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거나 확신을 하지 못하던 기드온이 이방 출신의 일개 군사의 말에 그렇게 180°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 사람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믿는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사람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로 둔갑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데 사람의 소리는 보이는 것만을 믿게 하는 사탄적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던 마태복음 4장은 사탄이 예수님께 도전했던 세 가지 공격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잡고 손에 잡히는 것을 줄 테니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을 너도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25절에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의 이 도마 신드롬을 신봉하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며, 요한복음 14:8절에서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의 빌립 신드롬을 추구하는 것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사탄은 빌립 신드롬과 도마 신드롬을 요구하도록 우리를 옭아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닫게 합니다. 기드온은 이렇게 하나님의 소리가 아닌 보이는 사람의 소리를 신봉하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잊혀진 제자도’를 쓴 달라스 윌라드 박사는 또 다른 책인‘하나님의 음성’(hearing God)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하는 데 필요한 것이 세 가지이다. 환경, 성령의 감동,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세 가지가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그 방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향임을 확신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도전을 줍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갈파를 통해 간직해야 할 도전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해석하고 느끼는 것이라는 도전입니다. 사정이 이런 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보이는 사람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착각하고 열광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형상을 감추십니다. 그리고 철저히 영으로 교제하십니다. 영으로 교제하시는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고 다만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멀리 계신 하나님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기드온은 미디안의 적진에서 아주 가깝게 사람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가깝게 들리는 사람의 소리가 기드온으로 하여금 보이는 하나님의 소리로 착각을 하게 했고, 들리고 보이는 사람의 소리는 기드온을 흥분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라고 확신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앙의 눈이 대부분 숨겨져 있는 더 위대하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사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수면 위에 올라온 얼음 조각 하나와 같은 얄팍한 사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신봉하고 따르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허다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주목하고 따르고 순종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더 소중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의 소리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인양 신뢰하고 따르는 우를 범하는 것이 현실에서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기드온의 행동을 통하여 받는 충격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양새는 취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소리에 예배하고 경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기드온을 통해서 자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소리에 경배하는 자의 결국은 18절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쟁에 임한 기드온은 나팔을 불며 ‘여호와를 위하여’ 외치라고 부하들을 독려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 있어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이 전쟁은 여호와께서 직접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그렇다면‘여호와만을 위하여’가 구호이어야 하는데 기드온은 ‘기드온을 위하여’를 첨가합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는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하나님을 대치하는 금송아지도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을 대치하는 그 어떤 것을 경배하는 경우 그것은 자기만족이요 자기 드러냄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경을 통해 조명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의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드온처럼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여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부정적 반전 드라마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영적으로 훈련하며 나아가는 긍정의 반전 드라마를 쓰는 세인의 지체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