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성결교회 금요 심야 기도회 설교’라는 제목의 pdf 파일이 목요일에 카톡 창에 떴다. 열어보니 A₄ 용지 5매 분량의 설교 원고가 담겨 있었다. 아들이 섬기는 교회 금요 기도회 설교를 맡았는데 심히 걱정이 되었나 보다. 원고를 작성하고 난 뒤에 본인 스스로가 마뜩잖았는지 내게 보낸 문자는 이러했다. “아버지, 읽어보시고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평상시에는 당당하더니 막상 닥치고 나니 많이 쫄았나 보다. 담임목사가 안식월 기간이라 이번에는 부목사는 물론, 교육 목사까지 공 예배 설교 순번을 정해주었는데 오늘이 아들 담당이라 내게 보낸 SOS인 셈이었다. 평소에 설교 이야기가 나오면 반색하며 “저는 아버지처럼 설교 하지 않을 거거든요!”라고 반기를 들던 놈인데 급하긴 급했나 보다. 원고를 읽다가 내심 웃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어디서 많이 본 포맷으로 구성된 원고였기에 그랬다. 더불어 지금 갖고 있는 목회적, 신학적 레벨 안에서 나름 용쓰고 애쓴 흔적이 보여서였다. 하지만 지적은 시니컬하게 했다. 원고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느낌 하나, 나 설교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라는 교만함. 둘, 본문과 치열하게 씨름했는가를 가늠하다가 냉정하게 아쉬움을 표했다. 간신히 커트 라인에 턱걸이 정도. 박하게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들이 갖고 있는 지금의 지성적 영성의 한계 때문이었다. 원고 컨펌(confirm)을 하고 몇 가지 보강할 내용을 전화로 알려주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아들, 단위에 올라갈 때 설교를 잘하겠다는 생각부터 버리고 올라가라. 나름 원고 준비에 최선을 다했으니 단 위에서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구하며 겸손하게 말씀을 전해라. 원고는 외워서 단 위에 올라가라. 스피치는 교우들 얼굴 보며 해라. 그게 설교자의 기본 예의다.” 오래전에 존 스토트가 전한 촌철살인을 접하고 밑줄을 그었던 적이 있었다. “설교는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편한 자들은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존 스토트, 그레그 샤프 공저, 『설교』, IVP, 111쪽) 존 스토트의 갈파를 만났을 때, 생각했던 웃픈 감회가 떠오른다. 나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스토트의 갈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제일 좋은 방법은 은퇴하는 일임을 말이다. 지나온 목회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신학적으로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설교는 정말로 은사인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설교자가 고달픈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시인 나태주가 읊조린 시말 중에 이런 시구가 있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 주고 보듬어 껴안아 줄 일이다/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열림원, 2022, 80-81쪽) 아들에게 나태주의 시어를 들려주고 싶은 오후다. 근데 참 이상하다. 금요일에 강서교회 심야 기도회를 향해 자꾸 중보기도가 나오니 참! 아들, 평생 웬수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