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현장에서 어머니에 대한 글을 많이 쓴 편이다. 반면 아버지에 대한 추억, 느낌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내 나이에 있는 아들들이 대부분 느끼는 서먹함 때문이다. 1924년 生이시니까 살아계셨으면 한국 연세로 올해 101세가 되셨을 아버님이다. 야만적인 일본의 강압 통치 시절에 태어나셨고, 한국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대에 육군 소위이셨기에 언제나 위험을 안고 사셨고, 315 부정 선거의 패거리 정치의 암울함도 경험하셨고, 그로 인해 찾아온 419 혁명이라는 짧은 봄날도 여운도 느꼈을 것이지만, 516 군사 정변을 경험함으로 근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체감하셨을 격동의 시대를 사셨기에 당연히 자식들에게는 가부장적인 권위를 갖고 계셨던 아버님이셨다. 하지만, 당신이 하셨던 전기사업의 실패를 통해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그냥 숨죽여 사셨던 아버님의 삶이 떠 오른다. 가슴 아픈 말이지만, 사업의 실패로 완전히 일어설 수 없는 연세가 아니라, 얼마든지 마음을 먹으면 재기할 수 있는 여력이 나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일어서지 못하셨다. 아내는 강하다는 말처럼 억척순이셨던 어머님이 아직도 어린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지시다 보니, 아버지는 더욱 작아지셨다. 어렸을 때 생각했다. 아니, 조금 나이가 들어 어느 정도 사리 판단이 가능해졌을 때, 왜 아버지는 생떼 같은 3남 1녀라는 자식과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무능했을까? 물으며 아버지에게 정서적 비수를 꽂은 적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나 역시 노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다다르면서 아버지의 뒷모습이 선연하게 보인다. 왜 일어서고 싶지 않으셨을까? 왜 처자식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겠는가? 왜 가장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당신은 다시 보란 듯한 삶을 살고 싶지 않으셨겠는가가 보인다. 당신의 입장에서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홀로’ 자괴감은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될 몫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고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쁜 아들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992년 4월 30일 막내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주일에 어머니께서 다니시는 교회에 아버지께서 첫걸음 하셔서 병상에 누우실 때까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주일을 지키시며 신앙의 여정에서 경주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교회에 처음 출석하시는 날, 참 많이 울었다. 단지 아버지가 교회에 출석하셨다는 감격 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여력이 있는 동안, 자식에게 아주 작은 힘이 되는 아비가 되겠다는 일념을 보여주신 그 사랑이 목에 겨웠기에 울었다. 2008년이니까 이제 아버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지 16년이 되었다. 목양의 현장에서 아주 힘이 들 때면, 아버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이천 호국원을 다녀온다. 납골함 앞에 서면 이렇게 기도하고 돌아온다. “아버지, 아버지의 막내아들도 태어나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때가 되면 다시 뵐게요. 응원해 주세요.” 2024년 어버이 주일에 아비를 삶을 살고 있는 나는 李 자 福 자 成 자를 가지신 아버지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나도 늙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