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파일을 보니 2020년 11월 4일 첫 번째 강해를 시작했다. 그러니 43개월 동안 수요 저녁 예배를 통해 창세기 여행을 부지런히 감당해 온 셈이다. 이제 50장 강해를 두 주만 감당하면 창세기 공부를 마치게 된다. 먼저 긴 시간, 그것도 이제는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 수요예배라는 낯선 환경을 통해 창세기 강해를 하겠다는 담임목사의 고집으로 인해 창세기 여행을 함께 떠나기 위해서는 수요예배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던 세인 동지들에게 칭찬의 박수를 우렁차게 보내고 싶다. 43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이 로망 하는 성경 텍스트가 세 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학부 시절, 존경했던 이상훈 박사를 통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가가 전한 복음서, 로마인들에게 전한 바울의 서신서, 루터가 쓰레기 서신이라고 혹평한 야고보서가 바로 그것이다. 현장에 나와서 강해 설교로 한평생을 달려온 세월을 반추해 보니, 선생님이 알려준 숙제를 내가 갖고 있는 역량 내에서 최선을 다해 연구했기에 후회하지 않는 공부를 했던 것 같다. (물론 신약 성서학자들이 볼 때 가소롭겠지만 ㅎㅎ) 반면, 구약은 내게만 아니라, 적지 않은 동역자들에게 외딴섬과 같은 미지의 영역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기에 지난 목양의 여정 안에서 구약 성서 강해는 신약 강해에 비해 그 노력을 배나 더했던 것 같다. 정말, 치열한 연구와 공부를 병행 했다. 뒤돌아보면 단독 목회 35년, 내게 진한 자국으로 남아 있는 구약 텍스트가 있다. 가장 관심을 갖고 달려온 것은 사사기 연구였다. 이제 다음 달에는 그 노력의 마지막 결과물인 『신-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 인쇄본 원고가 나온다. 하지만 내게 또 하나의 구약의 관심사는 포로기 이후의 역사서였다. 1〜3차까지 세 번에 걸쳐 연구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강해는 내겐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다. 목사로 살아온 내게 이 세 권의 책은 순간순간 닥쳐온 목회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어 준 보석과도 같은 텍스트였다. 또 하나,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는 구약 강해는 2018년 4월에 시작하여 코로나 공포가 막 밀어닥친 시기인 2020년까지 세인 공동체 지체들과 치열하게 함께 공부했던 욥기 강해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고 어렵기까지 한 욥과 함께하는 여행에 동참해 준 세인 지체들은 성자의 반열에 있는 교우들이다.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세인 공동체는 수년간 특새를 진행해 왔다. 꼬박 일주일 새벽의 영성을 지키기 위해 사수해 왔던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12 소선지서를 강해하며 은혜를 공유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12 소선지서 연구를 통해 나는 변방에 떨어져 있는(결코 그렇지 않은 데) 예언자들의 영성과 그들의 흉(凶) 예언 속에 담겨 있는 보석들을 캐냈다. 너무 감사한 여행이었다. 이제 다음 주면 목회자들이 경험하고 싶은 또 하나의 구약 텍스트 로망인 창세기를 마감한다. 이 여행을 마치면서 나는 구약 선생님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원 역사 연구 기간에 이희학 교수의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창세기 1-11장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20년 간)은 창세기 강해를 얄팍하지 않게 했고 큰 신학적 울림을 주도록 도움을 준 수훈갑의 역할을 해주었다. 원 역사에 대한 이해를 우격다짐으로 들먹이게 만들던 기존의 상투적 해석이 아니라, ‘톨레도트’를 기초로 한 창세기 기자의 설명을 공부하게 해준 질 높은 해석에 다시 한번 이희학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왕대일 교수께서 당신의 해박함을 전제하며 한국적인 표현으로 감칠맛 나게 저술해 준 『창조신앙의 복음, 창조신앙의 영성』을 접하다가 정말이지, 놀라운 경이로움을 발견했던 감동은 한동안 지워지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국내 구약 성서 신학자의 지도와 더불어 고든 J. 웬함과 스탠리 N, 건드리 등 네 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며 노트한 『창세기 원 역사 논쟁』 (새물결플러스간, 2020년)에서 수준 높은 구약학자들의 원 역사에 관한 토론과 내레이션을 접한 것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사정이 이런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이뿐이 아니다. 각 텍스트를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파티션하여 강해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 이다 보니 조금은 더 철저한 성서해석과 주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 것이 창세기 강해였다. 히브리어 원어 해석에 뒤떨어져 있는 내게 어원적인 도움을 준 2차적인 자료들도 내게는 선생님들이었다. 고전적 창세기 연구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폰 라드의 『창세기 국제성서주석』이 대표적 케이스다, 21세의 관점에서 읽다 보면 조금은 올드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김이곤 박사가 저술한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 (한국신학연구소간, 2009년)에서 나는 양식 비평적인 창세기 이해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장신대 하경택 교수의 집필한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2』 (킹덤북스 간, 2017년)에서 이희학 교수의 집필 내용과 중첩된 부분이 많이 보여 조금은 유감스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통전적 관점에서 해석한 족장들의 삶의 이야기를 열어가는 글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다. 통전적 창세기 신학 이해라는 말이 나왔으니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주석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구약학자라고 평가받는 월터 브루그만이 쓴 주석이다. 『현대성서주석-창세기』,(한국장로교출판사 간, 2008년) 창세기 강해를 진행하면서 매번 설교마다 본문 텍스트에 맞는 레마를 설정할 때, 설교자인 내게 번뜩이는 문장 설정을 돕게 해준 귀한 자료였다. 송병현 교수의 역작인 『엑스포지멘터리 주석 시리즈 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 2012년 간)는 창세기 강해를 평신도의 눈높이에서 강해하도록 견인해 준 압권의 책이었다. 이 책이 없었더라면 오늘 평신도 대상 창세기 강해가 과연 가능했을까를 논할 정도로 가장 은혜로운 구약 성서 신학적 작품으로 내게는 안성맞춤 자료였다. 많은 목회자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주석서이다. 전술했듯이 43개월 어간 달려온 창세기 강해가 다음 주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던 선생님들과 자료들은 무지하기 짝이 없는 나로 하여금 창세기 여행을 중단하지 않게 만들어 준 선생님들이었다. 하지만 창세기 강해를 마칠 즈음, 내게는 너무 고마운 개인 레슨 선생님이 있다. 평생 웬수 같은 친구, 차준희 박사다. 어려운 본문에 봉착했을 때, 상식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해 보이는 텍스트를 만났을 때, 어김없이 전화로 귀찮게 하는 친구의 집요한 질문에 성실하게 그리고 아는 대로 정직하게 답변해 준 친구 덕분에 대과(大過) 없이 창세기 여행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설교를 듣는 대상인 세인 교회 성도들의 입장을 뛰어넘는 강해가 되나 싶으면 언제든 단호하게 내게 메스를 대 준 친구가 있었기에 지루한 텍스트였지만, 창세기 강해를 선방하며 여행의 끝자락에 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친구의 호의와 가르침에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창세기 강해의 최고 수훈갑은 세인 교회의 교우들이다. 가장 재미없게 설교하는 담임목사가 기죽지 않도록 열심히 참석하여 경청해 주었던 세인 지체들은 내게 최고의 동역자들이다. 저들이 없는 창세기 강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동시에 교우들은 창세기 강해 기간에 설교 원고에 담긴 살아 있는 예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설교의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 선생님들이다. 그러기에 세인 지체들에게 더 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야곱이 바로에게 말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 47:9) 어떤 의미로 보면 야곱의 술회는 야곱만의 술회가 아님이 틀림없다. 바로 그대와 나의 술회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나는 배웠다. 내 삶의 길에서 만들어진 마중물들과 내용물이 험악한 세월의 엑기스이었음을 말이다. 그러기에 언제나 나는 창조와 역사의 주 앞에서 성실해야 한다. 내 삶의 끝 날이 오고 있음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창세기는 내게 이 은혜를 알려주었다. 신학생 시절, 구약 선생님이 항상 기도할 때 시작의 사족을 이렇게 붙이셨다. “역사와 창조의 주 하나님” 이 사족이 얼마나 엄청난 고백인지를 기도를 들은 지 40년이 훨씬 넘어서야 깨닫다니 나 또한 참 험악한 세월을 지나고 있는 게 맞다. 창세기, 성도들과 목회자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은혜의 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