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0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 마흔한 번째 강해) 본문 : 창세기 48:1-22 제목 : 그리 마옵소서 서론) 하나님의 능력과 일하심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어제, 화요일 아침에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큐티 제목입니다. 사도행전 2:15절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때가 제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그날, 제가 한 큐티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을 보았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상황에 충격을 받고 이구동성으로 이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베드로가 발끈하여 우리가 지금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요엘 예언자를 통해 약속된 성령의 임재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한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지금 시간은 오전 9시다. 이 시간은 안식일이나 절기 때는 금식의 시간이기에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시간이다. 새 술에 취했다는 궤변은 설득력이 없는 평가절하의 소리라고 항변했다. 베드로는 우리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신비로운 일과 현상은 성령의 역사라고 분명히 선포했다. 가만히 성찰해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체 역사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한 마중들이나 결과물들이다. 성령의 일하심이 배제된 교회 사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영적 분별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자들의 무지함으로 야기된 일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슬픔이다. 교회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지만, 이성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며 통치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는 유일한 영역이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한 자가 앞서가는 공동체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는 이름만 지닌 세속적 집단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순절 다락방에 있었던 지체들은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이들이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오셔서 성령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주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사람의 이성으로 분석하거나, 재단하는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임을 큐티를 통해 재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은 나라는 존재의 소유자가 그리스도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사야 43:1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로마서 1: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것’이라는 표현은 참 매력적입니다.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기에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주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을 역으로 역설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자유자재로 만지시고 만들어 가며 일하는 것에 대해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사도행전 10:14절을 복기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주일 설교를 통해 이미 살핀 대로 베드로는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린 뒤에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시몬의 집 지붕으로 기도하기 위해 정오에 올라갔는데 황홀한 환상을 경험합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내려오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그릇 안에는 각종 네 발이 달린 짐승과 기는 것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들을 일어나서 잡아먹으라는 소리였습니다. 베드로가 대단히 익숙한 자세로 거부했는데 앞에서 전술한 그대로입니다.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거부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4절 후반절입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인이며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라났던 자가 베드로였기에 그의 항변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늘에서 두 번, 세 번 반복적으로 베드로에게 뒤로 물러서지 않고 지속적으로 고지한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15절은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어제 아침에 나눈 큐티 제목이 “하나님의 능력과 일하심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였음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서 “이것은 깨끗하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내가 더럽다고 생각했던 내 이성과 의지를 꺾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영적인 지평이 이런데도 내 이성과 의지를 꺾지 않는다면 그건 곧 불신앙이자, ‘나’라는 인격을 신봉하는 신념을 믿는 이상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론) 야곱이 이제 임종을 하게 됩니다. 노환으로 보이는 인생의 끝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대동하고 고센으로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찾아온 요셉에게 기력이 다한 야곱은 침상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아들 요셉에게 가나안 루스에서 있었던 일과 친어머니 라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추억합니다. 루스 스토리는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추억을 회상한 이유는 단순히 야곱의 가문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 추억을 복기한 이유는 중요한 신학적 함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결코 애굽에 정착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고센은 나그네가 잠시 거주하는 처소이지, 본향이 아님을 역설한 것입니다. 이것을 각성한 야곱은 이윽고 요셉에게 이스라엘의 종교적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언약을 체결하며 언약식을 이행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무슨 뜻입니까? 야곱의 장자권과 차자권은 르우벤과 시므온이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르우벤과 시므온이 갖고 있었던 장자권과 차자권을 요셉의 두 아들에게 넘기는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러기 위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이 양자로 들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특별히 상황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작금, 고센에서 야곱은 요셉의 부양을 받고 있는 신세였기에 특별히 손자들은 양아들로 들인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 스펙트럼으로 조명해 볼 때,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⓵ 르우벤의 장자권 박탈이라는 의미를 봅니다. 창세기 35:22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잃고 에델 망대 지역에서 장막을 쳤을 때, 천륜을 저버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이 자기의 이복 동생인 단과 납달리의 친모인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천륜을 어그러지게 한 범죄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르우벤은 앞으로 살필 창세기 49:3-4절에서 언급된 대로 장자의 복이 끊어질 것이라는 예고를 받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시므온은 세겜에서 누이 동생 디나가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당하는 치욕을 겪자, 레위와 공모하여 세겜에 살고 있는 모든 남자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서 야곱은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야곱의 둘째, 셋째는 대량 학살이라는 해서는 안 되는 범죄의 원류가 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르으벤과 시므온은 장자권과 차자권을 박탈당하고 그 자리를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이어받게 된 성서적 증언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입니다. 드디어 언약의 이행식이 진행됩니다. 본문 15절에서 보고한 그대로 요셉을 먼저 강복합니다. 이어 야곱은 축복기도를 해주기 위해 손자들을 자기의 침상으로 초청합니다. 그리고 두 손자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강복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야곱의 행동이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두 손자의 머리에 자기의 손을 엇갈려 얹었기 때문입니다. 즉 왼손은 장자 므낫세에게 오른손은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 축복합니다. 이것을 본 요셉은 아버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아버지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반응합니다. 본문 17-18절을 나눕니다.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기뻐하지 아니했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라아’는 문자적인 뜻은 ‘상처를 받아 몹시 불쾌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요셉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도면 야곱이 물러설 만한 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은혜를 선포하는 메시지를 본문 19-2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하기를 마다하며 말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나도 안다. 므낫세도 민족을 이루어 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우가 더 크게 되고, 그의 후손은 민족들을 부유하게 할 것이다. 그러고는 두 아이에게 축복했다.” 결국, 이렇게 하는 것은 야곱, 자기의 뜻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요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를 선언한 야곱은 마지막 본문 22절에서 야곱은 세겜이라는 땅을 형이 아닌 요셉에게 줄 것임을 예언하며 본문을 마칩니다. 고센에 거주하고 있는 요셉에게 세겜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요셉은 훗날, 그 세겜으로 돌아가 그 약속의 땅에 묻히게 됩니다. 우리는 48장 강해를 통해 그냥 스치고 지나서는 안 되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 ‘그리하지 마옵소서’는 신앙의 월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려는 것을 포기해 달라는 강변의 의미가 이 문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내가 일해본 다음, 그것이 실패하면 그때 하셔도 늦지 않는다는 기가 막힌 불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또 이것저것이 안 되면 또 이 방법도 도입해 보고, 그것까지 안 되면 하나님이 그때 가서 개입하셔도 늦지 않는다는 대단히 도발적인 행위가 바로 ‘그리 마옵소서’에 담겨 있습니다. 내 의지가 관철되는 것을 보고 싶다면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의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의미는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의지를 꺾겠다는 결단이 신앙생활입니다. 요셉이 원하는 의지는 아버지 야곱의 오른손이 므낫세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더불어 왼손이 에브라임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다름을 아버지 야곱에 의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만류하는 요셉은 전형적인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대표성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월권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그리 마옵소서’가 아니라, ‘그리 하옵소서’의 신앙의 궤도로 들어와야 합니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기사 중에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 얽힌 메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를 보면서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죽도록 일하고 있었기에 힘에 부쳤기에 여동생에게 일을 하라고 야단쳐 달라는 마르다의 청은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청을 받은 주님은 조금은 서늘하게 마르다의 청을 거절하신 것을 보면 유감스럽기까지 합니다. 해서 저는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담론을 기록한 이 기사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조금은 조심해야 하는 설교자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마르다에게서 보이는 유감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40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 구절이 유감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르다는 주께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주님, 내 동생에게 부엌으로 나와 언니를 도와주라고 명령해 주세요. 형식은 주님께 청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절이 주는 충격은 마르다가 주님에게 명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목하고 유의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이 해야 할까지 월권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그리 마옵소서! 생각보다 많이 저지르는 월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이지, 그 분께 명령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어제 교단 목사 안수식이 있어 김환희 목사 격려 차, 안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안수 집례자는 국제 총회 총감독이었습니다. 그가 어제 안수를 받는 대상자들에게 동일 하게 적용하여 안수한 멘트는 이러했습니다. “나는 전 세계 나사렛 교우들이 인정하여 위임한 감독의 권위로 안수하노라” 등단한 교단 목사들은 국제 감독의 등에 손을 대고 또 대고 안수의 의미를 이어 목사 안수식을 진행했습니다. 국제 감독에게 위임된 권위는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런 소회가 듭니다. 인간이 조직화한 한 교단의 총감독에게 주어진 권위도 어떤 경우에는 극점을 달리는데 권위의 효시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해서야 되겠습니까? 권위의 본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월권해서야 되겠습니까? 다시 한번 곱씹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그리 마옵소서는 어울리지 않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고백되어야 하는 유일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그리 하옵소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충만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