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2) 제목: 정체성 (1) 본문: 요한복음 1:2-3 서론) 어제 진행했던 DPA 6기 사역 오후 프로그램은 『차도목과 따시목의 알쓸목잡 수다 떨기』 제하의 토크쇼(talk show)였습니다. 오전 세션으로 차가운 도시 목사인 임채영 목사는 설교 이야기를 강의했고, 따뜻한 시골 목사인 이강덕 목사는 독서 이야기를 강의했는데, 그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16명의 6기생 목사님들이 질문하면 강사 두 명이 대답하는 수다 떨기가 진행되었습니다. 오후 토크쇼 시간에 6기생 목사님 한 분에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1. 목사님께서 다독하게 된 이유나 그런 계기가 된 동기가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2. 강의안 마지막 페이지의 목회자들이 서점보다 종로 5가를 찾는다는데, 종로 5가의 의미가 쉽게 이해되지 않네요. 첫 번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질문하는 성도들에게 상투적인 답과 천박한 답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성적 영성이 필요한 데 목회자에게 이런 내공이 주어지는 것이 독서이기에 열심히 책을 읽게 되었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제 강의안 결론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이 대목이었습니다. 백석대학교에서 25년 동안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은퇴한 류호준 박사의 글을 읽었다. 글을 마치며 그의 독설을 한 마디 아프지만 소개한다. 왜 목회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가? 류 교수의 일갈에는 슬픈 풍자가 담겨 있었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우의정과 좌의정인 ‘구글’, ‘네이버’가 있기 때문이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167쪽) 21세기에는 영의정이 가세했다. 전능한 ‘유트브’다 한 편의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목사의 눈물과 땀과 피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 한다. 너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언제부터인 이 세 가지의 액체 담기를 포기한 것 같다. 왜 이리 담대한가? 구글, 네이버, 유트브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쳇봇까지 설교자를 돕고 있다. 이 무기들은 설교하기를 돕는 최적화되어 있는 최첨단의 천하무적 무기들이다. 이 무소불위의 무기로 무장한 목회자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쓰기 위해 서재에서 동선(動線)을 종로 5가로 이동한다. 종로 5가에서 서성거리는 목사는 이미 설교, 영성, 공부하고는 이별한 지 오래다. 아프고 또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씹을 것이 없는 푸석푸석한 빵 쪼가리를 내놓고 이것이 여러분이 먹어야 하는 하늘의 떡이라고 외쳐대는 것은 종교 행상인들의 허위 광고요, 그들의 직무유기이기도 하다.”(앞의 책, 137쪽) 적어도 DPA 6기 과정에 있는 동역자들은 직무 유기자(遺棄者)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종로 5가가 아닌 서재가 되기를 기대한다. 질문한 목사님의 두 번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양에 전심하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교회 정치에 기웃거립니다. 그들은 교회 정치의 산실이 모여 있는 종로 5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데, 여러분은 목회에 전심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목사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21장을 강해할 때 다시 세밀하게 다루겠지만 한 구절을 미리 만나보겠습니다. 21:15-17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목사라는 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정체성은 양을 먹이고 치는 자라는 인식입니다. 이 정체성에서 벗어난 자는 무늬만 목사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누구일까요? 본문 이해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본론) 본문 2〜3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지 담대하게 답할 수 있는 근거를 찾습니다. ※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위상이 곧 하나님임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 이들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선포합니다. 그분,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던 분임을 선언합니다. 그러기에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만,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또 하나, 결코 잊으면 안 되는 예수의 위상은 그분도 창조 사역의 공동 창조자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님의 위상을 하나님으로 높이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서중석 교수의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요한 공동체는 유대 회당으로부터 축출되었던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공동체였다.”(서중석, 『복음서 해석』, 대한기독교서회, 242.) 서 박사의 이 해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요한복음 9장 담론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실로암 못에서 고침을 받은 시각 장애인의 기적 담론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극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보지 못하던 이가 눈을 떴는데 이게 사달이 난 사건으로 비화됩니다. 예수께서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준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시각 장애인이 눈을 뜨게 된 날이었던 안식일이 문제의 화두가 아니라, 유대 종교 주의자들이 도저히 행할 수 없었던 기적을 예수께서 행하셨다는 것에서 야기된 시기와 질투가 문제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누가 낫게 해 주었던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을 뜬 사람은 축하를 받은 게 아니라, 곧바로 핍박이 임했습니다. 당시에 서슬이 시퍼런 종교재판소인 산헤드린 공의회로 소환되어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 앞으로 끌려가 심문을 당합니다.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잡으며 눈 뜬 자에게 윽박대며 소리를 지릅니다. 13, 16절을 보면 안식일에 눈을 뜬 것은 잘못이라는 트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에서는 너의 눈을 뜨게 한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냐고 윽박지릅니다. 그러자 눈을 뜬 자가 말합니다. 선지자입니다. 가관은 종교 지도자들이 눈뜬 자의 말에 분노하여 이번에는 부모를 부릅니다. 부모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윽박지릅니다. 네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을 받은 부모들의 답에 귀를 기울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9:20-23절을 주목하십시오.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보소서 하였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유대 팔레스타인은 유대 종교가 전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그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려면 유대교인으로 살아야 했고, 만에 하나 유대교에서 이탈하면 모든 유대 공동체에 누려야 하는 이권, 삶의 기본권, 생존권이 위협받던 시대였기에 유대교 공동체에서 출교당하는 것이 최고의 비극이며 재앙이었기에 부모들은 자기 아들을 고친 자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곧바로 사회적, 종교적 매장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주사위를 아들에게 넘깁니다. 집요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눈을 뜨게 된 이를 다시 불러 심문하며 너에게 눈을 뜨게 한 자가 네게 무엇을 했는지를 되물으며 너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유대 종교의 시각으로 볼 때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며 죄인인지를 다그치고 몰고 갑니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으로 있다가 예수의 은혜로 다시 눈을 뜨게 된 이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선언하는 보고가 요한복음 9:25절에서 통쾌하게 선포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시각 장애에서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의 담대함을 들은 유대 종교 수뇌부가 자행한 일을 요한복음 저자는 9:34절에서 고발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그렇습니다. 보게 된 사람을 출교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런 엄중한 종교적 범죄를 자행했던 유대 종교주의자들에 의해 공동체서 쫓겨났지만, 굴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적인 분투를 한 9장의 시각 장애인을 비롯하여 그런 저런 이유로 출교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요한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용기를 주는 메시지를 요한복음을 시작하는 서두에서 분명히 선포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다시 요한복음 1:2-3절을 읽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위상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유대 종파에서 출교 된 이들이 모여 있는 요한 공동체 가족들에게는 대단히 용기와 자존감을 주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유대 종교에 굴복하지 않고 따르고 의지하며 믿는 대상인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라는 선언은 혁명적 선언이자 공격적 선포였습니다. 이 선언은 기독교 공동체가 가장 연약했던 시기인 주후 1세기의 상황적인 핍박과 공격이 서슬이 시퍼런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살아갈 것인지를 통쾌하게 보여주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에게 임하는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고백하며 사는 삶의 주인공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알파를 구하지 않습니다. 유사 예수를 찾지 않습니다. 짝퉁 예수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8-11절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입니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전하신 메시지는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직설적인 명제였습니다. 오늘 설교와 무관하지 않은 교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 담론에서 자칫 잘못하면 간과할 수 있는 그리고 놓칠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위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언제나 빌립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빌립 신앙을 말하라고 한다면 대단히 계산적인 믿음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의 신앙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아닌 200데나리온이 먼저 신앙의 우선순위 자리를 꿰차고 있는 전형적인 현대인들의 신앙의 면모를 대변해 줍니다. 예수를 아버지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를 통한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실한 신앙인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기형적인 신앙의 인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구원과 의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으려는 사람들입니다.”(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복 있는 사람, 28쪽) 그렇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는 삶입니다. 그분이 내 삶의 마스터키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분이 내 삶 전체 질문의 해답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걸작을 남긴 사막의 수도자 샤를드 푸코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재철 목사의 『성숙자반』 1과를 보면 믿음의 대체어 20개를 소개하고 있는데 제일 첫 번째 대체어인 ‘지피지기’를 설명하면서 한 예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미국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의 회고담입니다. 어느 교인 부부와 함께 어떤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남편은 먼저 가고, 목사님은 그 부인인 집사님과 시간에 맞춰 파티장에 가려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집사님이 옷을 다 차려입고 나왔는데 집사님 가슴에 아주 멋진 목걸이가 하나 걸려서 번쩍번쩍했습니다. 목사님이 순간 그 목걸이가 진짜 같다고 농을 던졌습니다. 이 말이 나간 순간,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아차 했습니다. 이 말은 진짜 같다는 말은 목걸이가 가짜라는 말밖에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이기에 실수치고 큰 실수를 한 것이지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 당황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집사님이 화도 내지 않고 까르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이게 가짜인 줄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남편이 사준 보석은 특별한 날 외출할 때는 하지 않고 집에 놔두고 가기에 외출할 때 치장하는 보석은 다 가짜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큰 깨달음을 목사님은 얻었습니다. 진짜를 가진 자는 상처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이 고백한 토로의 진정성을 느끼십니까? 빌립보서 3:7-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세속적 지식을 얻기 위해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치열하게 수학하며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에서 말한 메시지를 초개와 같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진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취득하게 된 의는 율법이 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진짜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진짜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체성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예수 하나님의 공의 예수 하나님의 공의 주 독생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예수 제물이 되신 주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 예수 하나님의 사랑 주 은혜와 말씀으로 나타났네 예수 거룩한 하나님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