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4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다섯 번째 강해) 제목: 상대화시킬 걸 시켜야지! 본문: 요한일서 4:1-6 서론) “다른 목사님들도 다 이렇게 해요.” 정말로 많이 들었던 소리입니다. 풀면 이런 말입니다. “유별 떨지 말고 초록이 동색이니 관례대로 하세요.” 자세히 뚫어지게 살펴보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초록이 동색이게 행동한 것이 사실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죄인 된 심정으로 쓴소리도 자제하고, 공범의 죄를 자행한 목사라서 가능한 한 말소리를 줄이려고 하는 게 육십을 넘긴 목사의 읍소(泣訴)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설교의 서두에 이런 말을 담임목사가 끄집어내려는 것일까, 조금 불안해하는 교우가 있습니까?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황지우 시인이 오래전에 발표한 “만수산 드렁칡 1”을 잠시 나누어 보겠습니다. “오 亡國은 아름답습니다 人間世 뒤뜰 가득히 풀과 꽃이 찾아오는데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 우리 세상은 국경에서 끝났고 다만 우리들의 털 없는 흉곽에 어욱새풀잎의 목메인 울음소리 들리는 저 길림성 봉천 하늘 아래 풀과 꽃이 몹시 아름다운 彩色으로 물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른 체했습니다 우리는 不眠의 잠을 잤습니다 지친 사람들은 꿈을 꾸고 凶夢이 별똥들이 폭죽 쏘는 太平盛代 국경 근처 다른 나라의 방언을 방청한 풀과 꽃이 자꾸 어떤 信號를 보내 왔습니다 그 신호의 푸른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우리 허리에 걸친 기압골이 南端으로 내려갔습니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만수산 드렁칡 1에서』, 문학과 지성사, 13쪽) 이 시에 대한 각양의 시 해제는 생각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기에 차치하겠습니다. 다만 시 제목에 대한 해제가 눈에 띄어 교우들에게 인용한 것입니다. 만수산은 개성이 갖고 있는 그 유명한 송악산의 별칭입니다. 송악산 즉 만수산이 유명해진 이유는 고려말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 때문입니다. 포은은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씨족들의 반역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 일가는 고려의 정신이자 지주였던 포은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는 조선 개국이라는 명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끝까지 포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훗날 조선의 세 번째 왕이 되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죽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한 포은에게 마지막 신호를 보냅니다. 하여가라는 시조입니다. 이 신호는 선죽교에서 그를 살해하기에 앞서 보낸 마지막 제스츄어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역사학자들의 추론입니다. “이런들 엇더ᄒᆞ며 져런들 엇더ᄒᆞ료 萬壽山(만수산)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ᄒᆞ리 우리도 이ᄀᆞᆺ치 얼거져 百年(백년)ᄭᆞ지 누리리라” 여기에 수록된 ‘만수산 드렁칡’을 황지우 시인이 인용하며 이 시를 쓴 것입니다. 만수산 드렁칡의 시어가 주는 의미는 대단히 고결한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 없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요구했던 의미는 고려가 갖고 있는 그 가치, 우리가 계승할 테니 까다롭게 굴지 말고 우리와 한편이 되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것이니 유별 떨지 말라는 회유이자 협박이었습니다. 이런 협박에 포은이 죽음을 무릅쓰고 보낸 답신이 그 유명한 단심가였습니다. “이 몸이 주거주거 일 백번 고쳐주거 白骨이 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한 一片丹心이야 가쉴 줄이 이시랴” 이 두 시를 비교하면서 해제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고려라는 정신을 상대화하라고 요구했지만, 정몽주에게 있어서 고려는 결코 상대화할 수 없는 유일한 절대 가치로 답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황지우 시인은 나라가 망하던 조선말의 역사적 고통에 무감각하고 몰라라 했던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인 만수산 드렁칡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이들을 향해 맹폭한 시가 바로 앞에서 소개한 시입니다. 왜 아픔을 몰라라 할까? 왜 무너짐에 대해 무관심할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상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는 대단히 불온한 행위이며, 질 나쁜 범죄인데도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비극이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일입니다. 본론) 본문에서 요한일서 저자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본문 1절을 읽어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일서 강해를 시작할 때, 시대적 상황은 초대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영지주의 이단이 창궐하고 있을 때임을 주지했습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단에 대한 설명은 짧은 설교 시간에 개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정도로 매우 방대합니다. 해서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는 소그룹 성경 공부를 통해 나누기를 바라며 오늘 설교 시간에는 본문 텍스트와 관련한 내용만을 다루겠습니다. 주후 1세기와 2세기에 걸쳐 만연했던 영지주의의 예수에 대한 이해는 그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영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이단성입니다. 요한일서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염두 한 채로 이미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수많은 이론과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들에 대한 분별력을 확보하는 일임을 1절에서 선언한 뒤에 곧이어 2〜3절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내용을 선언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오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메시지이자, 교리의 정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형체를 갖고 우리에게 오셨음을 믿는 것이 올바른 영에 붙들린 자라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왜 이 교리를 강조합니까?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은 원래 너무 오염된 물질이기에 그렇게 육신을 입고 온 예수는 하나님일 수 없으며 그러므로 예수의 성육신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자들이었기에 2〜3절에서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들이기에 분별해야 함을 저자가 강력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요한서신 저자는 단지 경고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본문 4〜6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지주의적인 이단적 사상과 가르침에 대해서 마치 확인 사살을 하는 것과 같은 쐐기를 박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기에 저들은 세상의 말을 듣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전하는 직언과 충고에 귀를 닫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더불어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육신의 말씀과 은혜를 듣지 않는 저들을 보면서 우리는 반대급부의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으로 본문 단락을 마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분하는 결정적 단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주며 시사하는 교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진리의 영을 믿는 것인가? 미혹의 영을 믿는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척도라고 역설한 요한일서 저자의 본심을 레마로 적용해도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화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 가치입니다. 지난달, 30일에 나누었던 생명의 삶 텍스트를 다시 무대 위로 올리겠습니다. 열왕기하 17:24-28절입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도 집요하게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문서 이전 예언자는 물론, 호세아, 아모스 등등의 문서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했던 우상숭배의 죄에서 돌이키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보기 좋게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픔을 느꼈지만, 앗수르의 살만에셀을 도구 삼아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완전히 점령하게 하셨고, 지도에서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지도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말은 앞에서 읽은 열왕기하 17:24절의 상태를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살만에셀은 이스라엘이 훗날 독립을 꾀하거나 회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 집단적 인구 이동 정책을 편 것입니다. 대규모 앗수르의 위성도시 주민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고, 북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상당수를 빈 도시로 강제 이주시킴으로 사마리아의 야훼 신앙적 잔재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야훼께서 사마리아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 즉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림으로써 몇몇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자, 국가 권력에게 호소하기에 이릅니다. 사마리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영적으로 민감했던 자들이 자기들에게 임한 재앙은 이 땅의 신인 야훼가 행한 일이라고 살만에셀에게 보고하자 살만에셀은 울며 겨자 먹기로 포로로 잡아 온 이스라엘 출신 제사장 한 명을 급히 착출해서 사마리아로 돌려보냅니다. 이유인 즉은 사마리아로 이주한 자들에게 그 땅의 신인 야훼를 섬기는 방법을 교육하라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습니다.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살만에셀이 이스라엘 출신 제사장을 뽑아 사마리아로 급거 파송한 것은 임기응변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땅이 주인이자 모든 신의 신이신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에게만 경배하라는 의미에서 제사장을 파송한 것이 아닙니다. 야훼도 섬겨 그 신을 통해 노여움을 잠재우라는 얍삽한 명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사마리아는 이제 야훼라는 신이 그들을 믿는 백성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으로 자리 잡고 순순히 인간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 신이 돼 달라는 협박을 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상대화한 무례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와 똑같은 성정과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은 거절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의 공통 분모는 예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상대화함으로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다시 복기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저는 14절에 대한 주석 중에서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독설가로 유명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대단히 부정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도올 김용옥 박사의 주석이 은혜가 되니 참 이상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분은 시공 밖에 있는 절대 타자이기 때문이다. 로고스(예수)는 그 밖에서 우리 인간세계로 진입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계시다. 로고스라는 매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요한복음 14:9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다’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실존에 내재하는 신적인 존재의 자각성이다.” (김용옥, 『요한복음 강해』, 통나무, 146〜147쪽) 기막힌 통찰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 했다는 말이며, 그렇게 육신으로 오신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전한 것입니다. 김 박사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상대화하지 않는 예의를 지켰습니다. 단순히 김 박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탈권위적, 탈획일적 시대인 포스트 모던 시대나 혹은 그 이후 시대에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아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 가치입니다. 시편 106:19〜20절을 읊조려 보겠습니다.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시인의 단호함이 돋보이는 구절입니다. 시인이 선포하고 분노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시내산 아래에서 벌어졌던 난장판에 대한 후회와 반성의 토로였습니다. 이 구절이 설교자인 저를 타격한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출애굽하여 시내산까지 인도하신 야훼 하나님은 내(우리) 영광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 영광이었던 하나님을 풀 뜯어 먹는 소로 급전직하하는 만행을 자행했다고 술회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내산 밑에서 난장판을 벌였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소로 둔갑시켰을까요? 출애굽기 32:1〜4절을 먼저 읽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난장 백성들이 아론을 부추겨 만든 하나님의 형상은 ‘소’가 아니라 송아지였습니다. 차준희 교수가 명징한 해석을 소개하겠습니다. 차 교수는 이렇게 해제합니다. “여기서 ‘송아지(에겔)’라는 표현은 ‘애송이’라는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 그들은 금송아지를 야훼와 동일시하고 있다. 야훼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자유하게 한 출애굽의 목적은 이로써 완전히 왜곡된다.” (차준희, 『출애굽기 다시보기』, 프리칭아카데미, 315쪽)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야훼 하나님을 송아지로 격하시켜 일반적인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처럼 상대화해야 자기 맘대로 움직이고 조종할 수 있는 자기 멋대로 만들어내는 로봇 하나님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화하는 것은 타락의 출발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상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가치임을 심비에 새기시기를 원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쯤 해서 카일 아이들먼의 고전적인 인용문 하나를 다시 소환하겠습니다. “오래전 외국에서 사역하다가 미국 중서부에 있는 출가한 딸과 여생을 보내기 위해 귀국한 나이 지긋한 선교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선교사는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딸의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첫날 밤 버스는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했다. 선교사는 30년이 넘게 외국에 나가 있었고, 특히나 라스베이거스는 초행이었다. 일단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도 거리는 대낮처럼 훤했다.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 휘황찬란한 호텔들, 심지어 세상의 명차란 명차는 다 집합시킨 자동차 쇼,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도박과 슬롯머신에서 쏟아지는 동전 소리, 유명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하는 쇼, 온갖 진귀한 술과 음식을 파는 식당, 선교사는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온 선교사는 불을 켜지 않고 창문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고요한 가운데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라스베이거스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래 세상보다 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오늘 당신보다 더 좋은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NOT A FAN』, 규장, 182〜183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을 이 땅에 있는 것과 비교하거나 상대화시키지 마십시오. 주님을 상대할 가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연이어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여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의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