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8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네 번째 강해) 제목: 흔들리지 않기(3) 본문: 요한일서 3:18-24 서론) 이번 주 화요일에 담임목사의 다섯 번째 집필 도서가 도착합니다. 더불어 인터넷 출고는 8월 1일부터 시작된다는 출판사의 고지를 받았습니다. 랜덤으로 살고 있는 신 사사시대라는 방종의 모드가 장악한 오늘, 담임목사의 졸저가 올곧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남은 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무기가 되도록 중보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책의 프롤로그에 이 글을 실었습니다. 필자의 목회 철학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균형 목회다. 많은 이들이 말장난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신학은 진보적이어야 하지만, 반면 목회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난 35년간 현장에서 부대꼈다. 나는 이 두 개의 패러다임이 공존할 수 없다는 틀을 깨기 위해 목회의 장에서 한시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다.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이런 균형의 현장이다. 그러기에 까칠하기 짝이 없고, 융통성은 거의 제로인 담임목사와 함께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해 준 세인 교회 공동체의 교우들은 이미 성자다. 담임목사의 5번째 출간 도서인 본서는 세인 교회 교우들에게 헌정하는 게 당연하다. 이들이 있었기에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Ⅱ』도 나올 수 있었다. 신 사사시대 한복판에서 신실한 ‘크리스티아노스’로 경주하고 있는 세인 교회 지체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황인찬 시인이 쓴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서 시인은 이렇게 읊조렸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그것은 둥글다/빛나는 것처럼/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 민음사, 2022, 16.) 과유불급의 적용이라고 말할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 몇 년, 사사기는 내게 ‘백자’였다. 사사기가 나를 빨아들였다. 어떤 때는 분노의 블랙홀로, 또 어떤 날은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아딧줄로 나를 빨아들였다.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졸저임은 분명하지만, 두 번째로 세상에 내놓는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가 현장 목회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서기를 기대하며, 구약학자들에게 사사기 연구에 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은 사사기 Ⅱ』, 동연, 들어가는 말에서) 황인찬 시인은 백자가 있는 방에 들어서자 딱 한 가지만 보였다고 백자의 미를 극찬합니다. 백자의 미가 얼마나 수려한지 시인은 이렇게까지 언어들을 동원했습니다. 빛을 빨아들이는 백자라고.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니 시인은 그 방 안에 있는 여타 다른 물체들이 보일 리 없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집중하고 천착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만 보입니다. 외의 것은 내 시선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집중력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흔들림이 없는 영성이자 영력입니다.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이 땅에서 크리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로 살면서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세속적 가치의 공격, 교회 안에 있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의 휘저음에서 휘두름을 당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견지해야 할 두 가지 선행 자세를 나누었습니다. ⓵ 하나님께서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기에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믿음 갖기. 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살아가기. 이 두 가지의 교훈을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삶으로 살아내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은 그리스도인으로 2024년을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견지할 수 있는 세 번째의 내용을 교훈으로 받겠습니다. 본문 22〜23절을 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일,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감격을 누리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삶을 살게 되며 그런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교훈을 레마로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저자는 본문에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피력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라고 적시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너무 광범위합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저자는 이것을 감안해 또 친절하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랑함은 두 가지가 병행되는 사랑임을 우리는 압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수평적 사랑하기인데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웃 사랑입니다. 레위기에서 제정하고 있는 율법은 이렇게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이렇게 선명하게 명령합니다. 레위기 19:18절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율법을 기반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명을 주시며 그리스도인은 우리에게 재 조명하며 명합니다. 요한복음 13: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인 C.S. 루이스가 전했던 이 명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필요한 피조물을 순전히 사랑하심으로써 존재합니다. (중략) 하나님은 일부러 기생물을 창조하셔서는, 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이십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랑의 발명자이시자 사랑 자체이신 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C.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홍성사, 216쪽)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감동의 명제입니다.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명제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숙연해지며 영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명령의 당위에 동의는 하지만 행하기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지했는지 요한일서 저자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본문 24절을 남겨놓았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이렇게 변경하겠습니다.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왜 문장을 바꾸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흔들릴 리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흔들리지 않는 방법, 세 번째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강하게 다가옵니다. ※ 성령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요한일서 저자는 멈칫 하지 않고 역설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현상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24절 전반절) 이 구절을 영어 성경 NLT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Those who obey God's commandments remain in fellowship with him, and he with them. And we know he lives in us because the Spirit he gave us lives in us.” 직역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해 복종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친교를 통해 존재하며,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워싱턴 사귐의 교회 담임목사인 김영봉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이 상태를 이렇게 아름다운 수사로 표현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믿어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에게 빠져서 마음을 점령당하기 전에 주님께서 나에게 먼저 빠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 마음의 귀에 내가 너 안에 있다. 나도 네 안에 있고 싶다고 속삭이십니다.”(김영봉, 김영봉,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홍성사, 121쪽) 너무 명징한 교훈과 은혜가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주어집니다. 2024년이라는 신 사사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지 않는 방법은 주님과의 연합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자는 성령 하나님이 그들 안에 살아 계시기에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속의 가치와 신 바벨이라는 수없이 많은 괴물과의 영적 전투에서 흔들리지 않고 이길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묵상할 때마다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13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이 구절은 오늘 목사로 살고 있는 저에게 적지 않은 감동과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은 전도팀과 밀레도로 향하기 위해 드로아를 출발하여 앗소를 경유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전도팀과 밀레도 항구로 가려 했던 이유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듯이 밀레도에서 바울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도행전 20:13절에서 밀레도로 향하는 동선을 팀원들과 달리 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전도팀은 드로아에서 배를 이용하여 앗소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바울을 픽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의 주치의로 알려진 의사 누가를 비롯하여 여타 다른 동역자들로 여겨지는 일련의 팀원들이 앗소에 도착해서 바울을 태우려고 했는데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그들이 이용한 배에 같이 승선하여 밀레도로 가는 것을 마다하고 그들만 배로 보내고 자신은 도보로 밀레도까지 걸어갔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사도행전 20:13절입니다. 왜 바울은 이런 반응을 보이며 팀원들과 함께 밀레도 가기를 거절했을까요? 사도행전 20장의 정황들을 아우르면 그 답이 나옵니다. 바울은 1,2,3차 전도 여행을 순교적 영성을 갖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순교 여행만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에 앞서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아픈 해후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사도행전 20장을 통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바울에 권한 메시지를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2-23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순교 여행에 대한 만류였습니다. 올라가지 말라는 만류였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이들의 고육지책이며, 간절한 당부였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은 팀과 동행하면 다시 또 이런 만류를 할 것을 알았고, 그것이 괴로운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여 그렇게 만류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바울의 생각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황인찬 시인이 보았던 백자뿐이었습니다. 바울의 오직 한 가지 일념, 다른 것에 시각과 관심을 빼앗기지 않고 유일하게 몰두하던 한 가지 일은 사도행전 20:24절이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2 전반절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바울이 이렇게 단호하며 강하게 마음을 다잡이할 수 있었던 그 기저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레마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동하심으로 이루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었습니다. 이 한 가지 이유로 흔들리게 만드는 이들과 잠시라도 동선을 같이 하지 않은 것이며,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로, 앗소에서 밀레도로 홀로 도보 이동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에 붙들려 그것을 전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다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완독한 최재천 교수의 글 안에 담긴 교훈 하나를 전합니다. “황동규 시인은 외로움과 ‘홀로움’을 구별한다. 그는 ‘홀로움’을 ‘환해진 외로움’이라고 묘사한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 있음은 사무치는 외로움이 아니라 혼자서도 충만한 ‘홀로움’이다. ‘홀로움’은 말하자면 ‘자발적 외로움’이다. 자발적이고 철저한 자기 시간 확보가 창의성과 생산성을 담보한다.” (최재천, 『숙론』, 김영사, 2024, 75쪽)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길을 선택함으로 ‘홀로움’의 길을 기꺼이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 외의 그 어떤 다른 것에 현혹되지 않고 홀로움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바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너무 부럽고 감사한 믿음의 선진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받은 편지글을 당사자의 허락을 받고 교우들에게 공유하려고 합니다. 목사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한 주간입니다. 사업장에 곡소리를 나게 한다는 부가가치세 신고 기간이 내일까지입니다. 홈택스에 직접 신고하거나, 세무 사무소에 수수료를 내고 대리 신고하는데, 보통 대리 신고하는 경우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법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수수료 지급을 아까워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저도 대리로 신고하며 내심 낮은 세금 부여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오늘 배당받은 세금이 생각보다 너무너무 과중해서 속이 쓰리고, 손바닥만 한 새가슴이 파닥거리길 멈추질 않았습니다. 동시에 분노도 일었습니다. “아니. 왜 일을 이렇게 하는 거야? 이러면서 수수료를 왜 받는 거지?” 한동안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전쟁과 대치하며 금주에 읽고 묵상한 이재철 목사님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그대가 거짓말 한번 하면 만원이 생기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정직하게 오천 원에 만족하며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용기다.” 얄밉도록 원칙에 맞추어 세금을 산출해 낸 세무사에게 원망하던 제 마음의 정체가 뭔지 보였습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다 하는 그 당연한(?) 탈세를 돕지 않은 그에게 신앙인답게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세상 사람과 똑같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세속적이고 계산 앞에 쉽게 무너지길 자처하는 제 모습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고 두 겹 세 겹줄을 박박 쳐가며 호들갑떨 땐 언제고, 그 깨달음을 실천해야 하는 진짜 순간이 되면 '나 그런 거 몰라'하며 뒷걸음치는 비겁쟁이가 되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새벽예배 말씀 묵상하며 내 영혼이 죄에 대해 민감하기를, 세속의 방법에 타협하지 않기를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당당하게 (잔고 없는 통장을 탈탈 두드려서) 거금의 세금을 내보려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엄청 예민하게, 투명하게 제 모습을 대면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손해인듯하지만, 진리 앞에 의연할 수 있는 믿음, 하나님 앞에 두려워할 수 있는 겸손이 너무나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매일 가르쳐주시는 성령님께 감사드리고, 매일 말씀으로 먹여주시는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임순 집사 올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흔들리지 않으려면 홀로 가는 길에 대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이 외로운 길이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 예수와 온전히 연합하여 걷는 홀로움의 길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며 홀로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는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이타적 사랑을 감당하고 실천할 때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선한 능력으로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 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 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 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 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이전의 괴로움 날 에워싸고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주님께 모두 맡긴 우리 영혼 끝내 승리의 날을 맞으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 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 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주님이 마신 고난의 쓴 잔을 우리도 감사하며 받으리 주님의 남은 고난 채워가며 예수와 복음 위해 살리라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 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 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