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관건(關鍵)은?2024-06-22 11:54
작성자 Level 10

2024623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 번째 강해)

 

제목: 관건(關鍵)?

본문: 요한일서 3:4-12

 

서론)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소개한 최재천 교수가 올해 깊은 의미를 갖고 쓴 숙론에 담아 놓은 글 하나 소개하면서 설교의 문을 열겠습니다.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의 학교에 새로 부임한 백인 교사의 일화를 늘 가슴에 품고 산다. 시험을 시작하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홀연 둥그렇게 둘러앉더란다.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이렇게 말하더란다. 저희들은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는데요.” (숙론, 83)

최 교수도 언급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들은 게 많아지면서 잘못하면 내게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해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로 소중하고 또 소중한 인간이 가져야 할 본질적 가치를 상실한다는 점입니다.

겉모양의 화려함을 지키기 위해서, 쌓아놓은 가시적인 내 자아를 보존하기 위해서 더 소중한 가치나 진리를 모른 척하거나 잃어버린다는 점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에 의해 조국이 멸절되고 있는 비극 앞에서 행동하는 목회자였고 신실한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칭송을 받던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라인홀드 니버로부터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와 줄 것을 제안받습니다.

이에 제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본회퍼 목사는 1년 남짓 안락한 미국 생활을 하는 어간, 조국의 암울한 소식을 접합니다.

이윽고 니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나의 실수였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사의 힘든 시기를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이 시대의 시련을 나의 민족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복구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독일의 패전에 동의하여 기독교 문명을 더 향유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에 동의하여 우리 문명을 파괴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섬뜩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안정된 삶을 산다면, 내가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에버하르트 베트게, 디트리히 본회퍼, 복 있는 사람, 157-158)

결국, 독일로 귀환을 선택한 본회퍼는 히틀러가 1945430일 자살하기 불과 21전에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39세의 아까운 나이에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는 시대가 요구한 가장 정직하고 뛰어나게 행동했던 목회자로 남아 저 같은 후배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은 선배로 남아 있습니다.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았던 믿음의 선배도 그랬고, 인디언 보호 구역에 있었던 아이들이 추구하며 생각하던 것까지도 오늘 설교를 통해 같은 공통 분모를 제시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통상 어떤 사물이나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한자 단어로 관건’(關鍵)이라고 합니다.

관건을 자당(字黨)으로 풀면 이렇습니다.

: 빗장 관과 : 열쇠 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단히 어려운 숙제를 풀 수 있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단서 실마리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일이든지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일은 관건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전 이해를 전제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45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의 테두리 안에 갇혀 태어났습니다.

소위 말하는 원죄라는 틀 안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운명적으로 맞닥트리는 것은 불법을 저지르는 삶입니다.

4절에 기록된 불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노미를 문자적으로 풀면 노미즉 율법을 ’(부정하다)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법을 저지른다는 것은 법(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것이며 그 법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요한일서 저자는 죄라고 정의한 셈입니다.

말 표현이 너무 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표현이 적절하지 않아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인간은 불법을 자행하는 운명론적인 존재가 맞습니다..

이것을 아셨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 죄를 없애려고 오셨습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상투적인 기독교 용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탕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의 의도대로 우리가 죄에서 속량함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불법을 저지른 죄에서 탕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열쇠가 바로 69절에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한일서 저자는 강력한 어조로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6절에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고 표현했고, 9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그리고 하나님께 속에 거함으로라는 기록으로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에서 속량함을 받고 정결한 자로 서는 방법을 요한일서 저자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관건은 그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012절을 마저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같은 맥락이겠지만 불법을 자행하며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악한 자에게 속해 있는 자들입니다.

악한 자들의 정체는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못 박고 있으며, 더불어 가인과 같은 행위를 따라 하는 자들이기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한 자들의 삶과는 반대급부에 서야 한다는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분(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요한 계시록의 구절을 여기에서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스스로 요한이라고 지칭한 것이기에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이라고 동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함)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시합니다.

계시록 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관건이 무엇입니까?

주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57절도 압권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관건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 안에 있느냐가 영적 승리의 관건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50대에는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나 같고, 60대에 이르면 적게 배운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70대에 이르면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같고, 80대에 이르면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90대에 이르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 (김영봉,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홍성사, 155)

웃자고 한 글이겠지만, 정말로 적절한 수사 표현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런 공식이 통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0대든 50대든 60대든 아니면 그 이상의 세대이든 절대로 같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입니다.

같아질 수 없는 거리요 갭입니다.

믿음은 결과적으로 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사람에게 교사가 됩니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진면 교사가 되느냐 아니면 죽어도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 세워지느냐입니다.” (이재철, 성숙자반, 홍성사, 46)

지난 주간 담임목사 셀 사역에서 나눈 텍스트 중에 믿음의 대체어 20번째 내용입니다.

지체들과 20가지 믿음의 대체어는 나누는 중에 김지안 집사의 나눔에 모든 지체들이 감동의 감동을 받았기에 본인에게 허락받고 교우들에게 공유합니다.

저는 20번째 이 믿음의 정의에서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이 내용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동의했습니다. 해서 아들과 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분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 진면 교사를 삼아 훌륭하고 바람직한 자녀들이 되어주기를 기도 하고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글을 읽는데 또 다른 교훈이 제게 임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내 아들과 딸이 바라보는 진면 및 반면의 교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자녀들의 반면 진면의 모델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잘 살고 은혜 안에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모델이라는 사실이 저를 다잡이 하게 했습니다.”

집사님의 나눔을 듣다가 얼마나 행복하며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주안에 있지 않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결코 체휼할 수 없는 영성이기에 말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집사가 세인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이 담임목사에게는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살기도를 했습니다.

김 집사는 물론 우리 세인의 교우들에게 주 안에 있을 때만 공급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들이 쏟아지기를 말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그분의 씨가 배양되고 있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로부터 났음을 믿습니까?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7:252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시로-베니키아라는 이방 지역인 헬라 출신의 여인이 유대 출신의 한 남자였던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이례적인 결단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는 딸을 고쳐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유대 출신 남자 예수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입장에서 딸을 보고 있는 것이 어찌 보면 고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이라는 분이 지금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두로 지방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유대 땅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고 심지어 가장 솔깃한 것은 자기 딸과 같이 귀신이 들린 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이 들렸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사람도 치료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바로 그 예수께서 두로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흥분을 흥분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놀라운 한 가지에 집중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분을 만나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만나야겠다는 주님에게서 치욕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통상의 상식으로 보면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가복음 7:27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저는 이 구절을 오늘 설교와 연관하여 이렇게 적용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치욕을 당했어도 자기 딸의 유일한 치유자이신 그분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에서 물러서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관건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분 안에 있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을 그녀가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관건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분 안에 있습니까?

 

결론)

 

전도사로 부산에서 11개월을 사역했습니다.

제 사역은 심방이 주된 사역이었습니다.

사상에 심방을 갔습니다.

치매 초기 증상이 있는 80대 노 권사님을 위로하는 심방이었습니다.

치매 초기 증상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권사님이 아니었기에 교회 출석을 하지 못하시는 상태여서 가정 예배를 인도하며 위로하는 심방차 방문했습니다.

같이 심방 메이트로 동행한 여전도사님이 예배 사회를 보았는데 권사님께 물었습니다.

권사님,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제일 좋아하시는 찬송가가 뭐죠?”

그러자 귀도 어두워 듣기도 불편한 권사님이 되물었습니다.

전도사님, 뭐라고요?”

권사님, 제일 좋아하시는 찬송가가 뭐냐고요?”

귀에 대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는 여전도사님에게 권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그거 있잖녀요. 주 안에 있는 거

눈치 빠른 전도사님이 말했습니다.

찬송가 455장을 부를게요.

옛날 찬송가 4551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주 안에 머무릅시다.

주 안에 거하십시다.

주 안에서 이탈하지 마십시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

그의 눈이 머무는 곳은 나의 슬픔과 고통

고갤 들어 그의 눈을 볼 때에 난 알았네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

그의 손길이 닿는 곳은 나의 상처와 아픔

영원히 흐를 것 같았던 눈물 다 멎었네

예수 나의 치료자

 

나 노래하리라

천한 나를 돌아보신 구세주를 찬양해

하늘 닿는 곳까지 내 손 들리라

예수 나의 치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