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6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여섯 번째 강해) 제목: 증거가 있습니까? 본문: 요한일서 2:7-11 서론) 홈페이지에 김기석 목사의 은퇴 기념 출간 도서인 『고백의 언어들』에 대한 독서 리뷰를 올려놓았습니다. 리뷰 내용 전체를 다 기록하려면 엄청난 분량이 될 것 같아 1장과 5장에 대한 리뷰를 올려놓았습니다. 이 책은 먼저는 목회자가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교우들이 있으면 꼭 한 번 섭렵해 볼 필요가 있는 질 높은 양서라 추천합니다. 리뷰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제 4강에 들어 있는 글 하나 설교를 시작하며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평소 교회를 다녀도 그 인격의 중심에 십자가가 서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직분도 받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 생활도 소홀하지 않고, 봉사 활동도 동참하지만 씨가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이런 경우를 가리켜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거의’라는 말이 참 애매합니다. 그런데 웨슬리 목사는 매우 단호합니다. ‘거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거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김기석, 『고백의 언어들』, 복 있는 사람, 247쪽) 김 목사의 은퇴 고변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만에 하나, 나는 물론이거니와 세인 교회 교우들이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지? 그때 그것을 알게 되면 이미 때가 늦을 때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김 목사가 지적한 대로라면 ‘거의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분명합니다. ‘씨가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 세인 지체들이 꼭 개진하고 복기하며 되새김질해야 하는 명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씨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설교를 통해 알아볼 본질적인 교훈에 접근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씨가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의 본문이 씨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본론) 본문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7〜8절을 만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요한일서 저자는 이 편지를 읽는 수신자를 1장에서 언급한 단어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분명히 1장에서는 저자가 수신자를 ‘나의 자녀들아’라고 호칭했지만, 2장에서 이렇게 호칭을 바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아가페토이)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인 ‘아가페’ 사랑에 대해 해설을 신약 성서학자의 도움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명사 ‘아가페’(사랑)는 신약성서에 총 116회 나타난다. 요한서신에 21회, 고린도전서에 14회, 에베소서에 10회가 기록되었다. 동사 ‘아가파오’(사랑하다)는 모두 143회가 등장한다. 요한복음에 37회, 요한서신에 31회 등장하여 신약성경 중에 제일 많이 나타난다. 형용사 ‘아가페토스’(사랑스러운)는 총 61회가 사용되었는데 요한서신에 10회, 로마서에 7회, 베드로후서에 6회가 사용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아가페)이라는 어군은 요한과 관련된 문헌에 106회 등장하고 권별로 분석해 보면 요한일서에 52회가 등장함으로 가장 많이 시용되었다.” (서형석, 『요한일이삼서-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서주석』, 대한기독교서회, 75쪽) 서 박사의 자료에 근거한다면 요한서신의 저자가 이 편지를 받는 대상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호칭한 이유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인 증거는 그가 지금 사랑하고 있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김기석 목사가 던진 화두대로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갖고 있어야 할 씨가 ‘ 사랑하기’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저자는 편지를 쓰면서 이 글을 읽는 대상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의 내용 안에 담겨 있는 알맹이는 옛 계명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요한 공동체 안에 들어온 형제 모두가 들었던 메시지이며 단어임을 다시 천명한 것입니다. 반전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 계명, 그래서 옛 계명과 다를 바는 없지만, 지금 편지를 수신해야 할 요한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은 사랑하라는 이 권고를 새 계명처럼 여기고 새겨야 한다는 것을 명징하게 적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적절한 증거를 이어지는 9〜11절에서 언급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말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그 빛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것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지 2:9〜11) 엄청난 성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말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밫 가운데 있다면 그 증거는 교회 공동체는 물론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형제와 자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내가 빛에 거한다고 입으로 떠들어도 형제를 미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빛에 거하는 자가 아니라 여전히 어둠에 거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잠시 인용한 배화여자대학교의 서형석 박사가 이렇게 신학적 용어로 요한일서 2:9〜11절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지식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며, 신앙생활 자랑보다 하나님 사랑 실천이 먼저이며, 영성 생활 자랑보다 하나님의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서형석, 위의 책, 78〜80쪽) 오늘 본문 해석을 마치고 우리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교훈이 제게 임했습니다. 요한일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빛에 거하는 자의 증거는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자신이 빛에 거한다고 떠들어도 어둠에 거하는 자임을 고발했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한다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오늘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이 간직하고 실천해야 하는 5월 마지막 주일에 주시는 레마입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너’라는 인격적 존재를 환대한다는 말입니다. 몇 주 전에 한 자매가 찾아와 본인의 고민을 털어놓기에 경청해 주었습니다. 어떤 이에게 헨리 나우웬의 책을 소개받았는데, 그 책을 읽기 위해 나우웬이 누구인지를 인터넷 웹 서핑을 통해 정보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말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자매가 제게 질문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목사님, 헨리 나우웬이 동성애 지지자라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의 책을 읽어야 합니까?” 저는 질문을 받고 조금은 머뭇했습니다. 질문자는 이미 대단히 심각한 반기독교적인 인물이 쓴 책을 읽는 것은 본인도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 묵인하는 것이라는 강한 입장을 갖고 있는 자매였기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를 놓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날 자매는 제가 그 책은 불온한 책이니까 읽지 않는 게 낫다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고, 적어도 저를 아빠처럼 신뢰하는 딸이기에 저 역시 그렇게 답을 해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대화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자매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헨리 나우웬에 동성애자들을 지지하는 성향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소중히 남긴 낮은 자와 함께 했던 족적들까지 놓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해서 자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동성애 지지자라는 성향이 네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보여주었던 삶은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바드와 예일대학교라는 인정받고 충분히 안락한 생을 누릴 수 있었던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의 정신 박약아 아동들을 섬기기 위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로 들어가 그의 전 인생을 바쳤던 삶의 흔적들까지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는 나와의 입장이 다른 이들을 향한 환대란다.” 제가 이렇게 말했지만, 자매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매가 갖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카테고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틀은 죄인이 해야 할 일은 죄의 자리를 떠나서 철저히 회개하는 삶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인한 것이 아닌데도 그 자매는 고개를 젓고 떠났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제천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 동성애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갈 교회를 찾았는데 교회에서 이렇게 전제 조건을 걸었습니다. “청산하고 교회에 나와라. 그러면 안아 주겠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럴 용기가 없는 아이였습니다. 더불어 그 아이는 자신의 DNA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확신하는 아이였기에 교회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조건을 걸지 않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기가 어렵겠지만, 그 아이를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온 그 아이의 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대하면서 공통의 분모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는 말씀에 대한 진정성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동성애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고 전하는 것에서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양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 아이가 말씀 앞에서 선택해야 하는 일은 저와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그건 전적으로 그 아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메시지 자체를 본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아이는 교회에 정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까지도 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자유의지에 따른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교우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태도는 길목 자체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야만적 행위가 아니라 길을 열어 놓고 환대하는 마음이 바로 사랑하는 것임을 주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상대방의 자리까지 내려가는 것을 전제합니다. 저는 상대라는 대상의 눈높이로 내려가는 작업을 환대라고 정의합니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말한 내용이 자꾸만 저를 꿈틀거리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 그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접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207쪽) 헨리 나우웬은 이런 환대를 몸소 보여준 사람입니다. “내가 믿고 싶어 하는 하나님은 여기에 있습니다. 만물을 지으시던 때부터 팔을 내밀어 너그러운 은총을 베푸시는 아버지입니다.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늘 기다립니다.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축복을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하루빨리 자녀들이 돌아와 그 어깨에 피곤한 두 팔을 내려놓고 사랑을 속삭이게 되기를 늘 고대합니다. 아버지에게 소망이 있다면 복을 빌어 주는 것뿐입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특별기념판, 포이에마, 151쪽)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환대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이렇게 환대를 본인의 편지에서 에둘러 표현했습니다. 다시 본문 9〜11절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견고하게 붙들어야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 환대하지 않는 자는 늘 어둠에 붙들려 있는 자라는 메시지입니다. 빛에 거하고 싶습니까? 타인을 환대하십시오. 이것이 주군이 알려주신 영적 비법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다음 달에 출간 예정인 담임목사의 다섯 번째 책, 『신-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Ⅱ』 마지막 나가는 말에 담은 글감 하나 소개하고 메시지 전달을 마치려 합니다. A.J. 크로닌, 『천국의 열쇠』에 나오는 클라이맥스 부분입니다. 중국에 몰아닥친 페스트로 인해 프랜신스 치셤 신부가 사역하던 외방전교회 일대에도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치셤의 절친이지만 무신론자였던 의사 셜록이 치셤의 사목 지역으로 자원하여 도착했고, 그곳에서 많은 환자를 돕다가 본인도 결국 페스트의 감염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치셤은 임종을 앞둔 셜록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지만 무신론자 셜록은 끝내 회심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치셤은 셜록에게 임종 성사를 진행한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가 치셤에게 반기를 들고 저항한다. 비신자에게 임종 성사를 하는 게 가톨릭의 교리와 전통에 반하는 이단적 행위라는 것이 수녀의 지론이자 저항 이유였다. 매섭게 저항하는 원장 수녀에게 치셤 신부가 전한 메시지는 적어도 내게는 충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감동이었기에 졸저 원고를 교정 후 출판사에 넘기기에 앞서 나가는 말에 이 내용을 담았다. “나름의 종교를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참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반짝이는 눈으로, 점잖은 불가지론자를 보고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봐라, 내가 여기 있다. 너는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여기에 있다. 네가 그렇게 없다고 주장하던 천국에 들어가거라.” (A.J. 크로닌, 『천국의 열쇠』, 이윤기역, 섬앤섬, 2014, 383.) 치셤의 말을 인정하는 자를 가리켜 이단적 사상을 갖고 있는 반기독교적인 불온한 인물이라고 벌 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필자가 이 글을 졸저에 담은 것은 치셤의 논리를 교리적 차원의 가부로 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할 때 결코 양보할 수 있는 요소 중의 하나가 ‘타자에 대한 환대(Hospitality)’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집중된 ‘나’는 엄격한 잣대로 바라보면 ‘괴물’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 대하여 열려 있고 포용할 때만 건강한 ‘나’로 존재할 수 있다. 하물며 신앙인이 폐쇄된 공간 안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위험함을 넘어 해롭기까지 한 존재다. 몇 해 전, 참 의미 있게 읽었던 나희덕 시인의 시어가 나를 강타한 적이 있어 한동안 그 감동의 충격으로 인해 나를 철저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녹슬어 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 먹었다.”(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조롱의 문제에서』, 문학과 지성사, 106쪽) 타자를 배제한 나의 신앙적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내게 임하는 치명타는 내가 녹슬어 가는데도 그것을 감각 하지 못한다는 무통증과 무감각의 재앙이다. 감각함과 환대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자 은총이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여러분과 관계하고 있는 모든 타인을 환대하면 여러분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가장 유효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들을 박대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거의 그리스도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타인을 환대하는 사랑의 메신저들이 다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런 빚도 지지 말자 우리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천사의 말을 하고 모든 믿음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어요 우리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런 빚도 지지 말자 사랑은 하나님의 것 사랑은 하나님의 것 사랑은 하나님의 것 우리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의 것 사랑은 하나님의 것 사랑은 하나님의 것 우리 서로 사랑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