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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사랑한다는 고백에 맘 설레고 싶은 사랑꾼을 위하여- 시와 사랑 Ⅶ 집2024-06-11 10:2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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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박경철
ㆍ출판사 파랑새미디어
ㆍ작성일 2023-07-18 11:57:13

 

박경철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맘 설레고 싶은 사랑꾼을 위하여- 시와 사랑 Ⅶ 집』을 읽고 (파랑새미디어 간, 2023년 간)


저자의 號가 靑死다. 한글 2022 오피스 한자 熟語集에 없는 단어다. 저자에게 왜 이런 예사롭지 않은 호를 지었는지 직접 물어보지 않았지만 저자가 일곱 번 째로 내놓은 본 시집을 읽으면서 나름 짐작했다. 저자가 수없이 되 뇌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천상 ‘사랑꾼’이다. 바울 사도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다소 충격적 어휘를 사용함으로 정말 말 많고 탈 많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보낸 네 번째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영적 시금석을 던졌다. 하나님께 미치라고 도전이었다. 같은 맥일까, 저자는 사랑에 미쳤다.
한 주 전, 저자와 운동모임을 가졌는데 잠간 사적인 시간에 본 시집을 내게 주어 감사히 받고 기쁨으로 읽었다. 저자는 이전에 벌써 6번의 시집을 출간한 이력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을 정도로 나는 그의 시 문단 활동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의 문학적 활동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러기에 저자의 시집을 받고 詩評을 한다는 것이 꽤 겸연쩍다. 이유는 간단하다. 필자가 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평론하는 글을 썼고, 평론집까지 출간한 나지만, 詩評은 왠지 모르게 거북하고 불편하다. 마치 석사학위 소지자가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논찬하는 꼴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작(作) 한 글을 받았는데, 몰라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친구와 대학 동기라는 끈을 동여매고 몇 자 적어보는 용기를 냈다.

이성복은 이렇게 말했다.

“시를 쓰는 건 말의 수로(水路)를 만들어주는 거예요.”(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 지성사, 15,)

정말 기막힌 설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인을 정의할 때 주저 없이 천재들이라고 말한다. 말의 수로를 만들어주는 것을 아무나 할 수 있나! 천재들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기에 그렇다. 천재 시인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김수영은 ‘절망’이라는 시의 마지막 聯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 『김수영 전집-시』, 민음사, 323.)   

이런 류의 해제는 천재들만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시인을 천재라고 하는 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그 누가 내 발언에 대해 취소하라고 하더라도 굴복하고 싶지 않다.
친구의 7번째 시집을 접하면서 참 부끄러웠다. 왜? 시집 독서를 마치고 이렇게 나를 타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요한 치열함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몰이에 대한 이런 전문가가 있을까?”

뭐 이런 소회가 나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열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사랑은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는 것이고, 감정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가슴의 언어를 토해내는 가장 거룩하고 절절한 아름다운 노동입니다.”(4-5)

마음 한켠에 소복이 쌓인 시어가 나를 설레게 했다.

“사랑은 평가 받는 것이 아니다.”

적확하지 않은가! 평가를 받기 위해 행한 사랑은 이미 사랑일 수 없고, 다른 면으로 평가가 되는 사랑은 도리어 수치지 사랑이 아니기에 그렇다. 저자는 이것을 전제로 사랑의 랩소디를 불러나가고 작곡해 나간다.

“바라볼 때 생각할 때 말할 때 설렘이 없다면 건조한 인생 맞습니다.” (5)

가톨릭 영성주의자 토마 머튼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견지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이와 하나 됨을 실현하기를 추구합니다.”(박재찬,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만』, 분도출판사, 130)

황홀하지 않은가! 생각, 이념, 종교, 사상, 성별 등등이 다른 이들과 하나 되기 위한 평화로 가는 길을 만들어가는 여정이 설레지 않은가 말이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참여했을 때, 여리고와 나사렛을 진입하면서 받았던 충격은 이 땅이 ‘평화의 땅’이라는 레떼르를 갖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율배반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라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이 높이 쌓은 담은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과 은총이 묻어난 사랑 때문에 다가온 설렘이 아닌 분열과 반목과 공포 그 자체로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endless love’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멋이 있는 사랑은 세월의 풍랑을 넘어 함께 가는 순례입니다.”(18)

동의한다. 전적으로. 사랑은 순례다. 같이 걸어가는 순례다. 이집트, 앗수르, 이스라엘이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는 순례가 사랑이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라는 대단히 작위적인 이름으로 지어진 자들이 그 이름의 벽을 허물고 같이 걸어가는 순례가 사랑이다. 고용인과 비고용인이 서로 맞잡은 손이 사랑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눈 부라리지 않고, 서로 따뜻하게 심장과 심장을 맞대어 심장소리를 공유하는 것이 사랑이다.
 
“까짓 거 눈물 한 번 닦지 뭐, 살아보니 사랑은 눈물 없이는 안 되더라” (44)

저자의 아내는 지금 생사라는 명제 앞의 갈림길에서 투병하고 있다. 저자에게 아내를 위한 정서적 동통(同痛)의 언저리가 얼마나 깊이 패어 있을까를 생각하면 애잔하다. 그러기에 저자가 흘리고 있을 눈물의 내용이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멋들어진 역발상인가! 까짓 거 눈물 한 번 닦는단다. 저자가 존경스럽기까지 한 대목이다.

“말없이 그냥 포옥 안아주면 된다. 지금은 그게 최고야.”(46)

저자의 시어를 읽다가 부끄러워졌다. 목회가 뭐, 별 건가. 그냥 안아주는 건데. 그걸 이 딴지, 저 딴지를 들어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꽃길을 만나려면 가시밭길 지나야 주어지는 기쁨인데 아픔을 싫어하고 눈물을 피해가며 풍요로움을 꿈꾸니 정말 몹쓸 짓이다.” (64)

복음이다. 목회의 연륜이 많아지다 보니 늘어나는 것은 얍삽한 수단이다. 인위적인 스킬이다. 내 이러려고 목사가 된 게 아닌데! 를 연신외치지만 두께는 더 두꺼워지고 있다. 섬세한 시인 나희덕은 이렇게 詩作했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가 있어/마른 쑥 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 오르는 메뚜기에도 삶의 속도는 있어/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시선, 25)

하물며 목사라는 성직의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내 삶의 무게를 피하고 싶어 편안함과 편리함에 길들여지려 하는 못됨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으니 유구무언이다. 저자의 일갈이 죽비가 되어 내 음흉한 세속의 어깨를 내리친다. 저자는 춘애(春愛)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안녕 하는 아픈 겨울 나를 올리고 너를 띄우며 우리가 앉아 노래 부른다/봄이 오고 새싹이 피어나도 서로에게 눈 멀었던 그리움의 눈물 여전히 흐를 거다.”(121)

이 시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충혈 된다. 왜 이리 따뜻하지? 왜 이리 울컥하지? 이제는 여성 호르몬이 나올 나이도 지났는데. 반대로 순간, 화가 치민다. 저자는 이런 감성으로 살았고 또 살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뭐하고 살았지! 저자에게 크게 한 방 맞은 느낌이라 정신이 번쩍 든다. 적어도 목사로 사는데 이 감성은 꿈틀거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울컥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이 해 본다.

“살아 있음이, 바라보고 있음이, 함께 걸어감이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다” (129)

내 옆, 앞, 뒤에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걷고 있어 너무 감사하다. 무엇보다 저자가 이렇게 살고 있어 행복 플러스다. 왜? 나는 그의 친구니까.
 
“사랑의 생채기에 순수함이 묻어 있는 아날로그가 그리운 건 인생을 모르다기보다 디지털의 폐해를 넘은 사이버 오수에 잠긴 잃어버린 알몸의 신비 늦지 않았다. 손 편지라도 써서 사랑의 순수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사는 멋이 있고 살 맛 나니까” (166)

몇 년 전, 저항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를 만났다. 그가 읍소한 시 한편에 완전히 포로가 된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다, 그건/나의 생(生)이었다/내가 그걸 보았다/바깥에서부터, 길다란 드러누운 나무 한 그루/드러난 뿌리들이 그러쥐고 있었다/바닥에서 딸려 나온 흙을/내가 보았다, 그건, 나의 생(生)이었다/하늘은 없고”(라이너 쿤체, 『나와 마주하는 시간』, 봄날의 책, 103)

친구의 시어와 쿤체의 읍소를 읽으며 왠지 모를 거룩함을 체휼했다. 오토가 일갈했던 ‘누미노제’의 경험과 같은 두려운 신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내가 그런 나이인가 보다.

며칠 전, 서재에서 이문세 7집 LP를 들었다. 타이틀곡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를 듣는데 이 가사가 뇌가 아니라 심장을 덜컹거리게 했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려 넘쳐”

이 노래 가사가 들린다. 하지만 친구의 시집을 덮고 나서 다시금 나를 다그쳐 본다. 지겨운 사랑은 없다고. 

시집을 읽는 내내 사랑앓이를 했다. 그것도 그냥 앓이가 아니라 깊은 앓이를. 이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귀천하는 사람은 푸르게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친구는 靑死다. 시인인 친구가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