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말씀 등불 밝히고(1)2024-06-11 10:2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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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기석
ㆍ출판사 꽃자리
ㆍ작성일 2023-07-14 15:53:20

 

김기석의 “말씀 등불 밝히고”(꽃자리, 2023년 간)를 읽은 뒤 나누는 첫 번째 이야기


금년 1월, 필자의 네 번째 졸저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를 출간할 때 지면이 300페이지를 넘어서면 독자들이 만지지도 않는다는 지인의 충고가 있어 고심했다. 370페이지를 넘나드는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고 분량이 1,0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상황에서 더 줄인다 하더라도 시리즈 1,2권의 출간 계획을 세웠기에 더 줄이는 경우 2권 출간에 난처함이 있을 것 같아 무식하지만 감행하기로 했다. 그렇다. 200페이지 분량의 책도 읽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세태가 작금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종이책 자체를 지니고 다니는 것조차도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니 유구무언이다. 그러기에 e-book이 아니면 선택당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독서 기상도가 2023년의 자화상이다. 사정이 이런데 도서출판 ‘꽃자리’는 2023년 4월 미친 짓(?)을 했다. 종이책 지면이 850페이지에서 몇 장이 적은 분량의 책을 출간했으니 말이다. 목사 이전에 수익을 창출해야하는 출판사 CEO인 한종호 대표, 이런 면에서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다. 물론 필자는 안다. 그가 한국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불어 저자가 설교를 통하여 제시함으로 혹자가 말한 그대로 불치병에 걸려 있는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치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흑자 경영 등등의 유불리를 떠나 이 책을 이렇게라도 출간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그 선한 의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한다. 하지만 ‘참’은 참이다.
이제 이 무시무시한 책을 읽고 리뷰를 작성하고자 한다. 이런 면에서 필자도 범인들이 볼 때 무모하고 대책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도진개진이다. 동시에 저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정말, 쓸데없는 짓(?)일 수는 있는데 뭐, 어떻게 하랴! 내 팔자려니 생각하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며 목회적인 사고와 신학적, 여타 학문적인 접근을 함에 있어서 상당한 도전과 사유함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선배의 뜻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쓸데없는 일을 해보려 한다. 
“말씀 등불 밝히고” 
늦깎이 독자가 되어 본서를 필자가 손에 넣은 지 이제 3일째다. 알짬을 내서 독서를 하고 있는데 갈 길이 멀다. 아마도 이 글에 대한 북 리뷰는 세 번에 걸쳐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이제 눈도 많이 침침해서 독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를 괴롭히고 있는 ‘꽃자리’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지만 첫 나눔이 싫지 않다. 누구보다 행복한 첫 여행을 마쳤기 때문이다.
영연방의 최고 회당 랍비를 역임한 조너선 색스는 일찍이 이렇게 일갈했다.

“우리가 극대화해야 하는 궁극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함, 모두가 창조주 하느님의 평등한 자식인 인간의 존엄함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통찰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하는 통찰임에 틀림없다.”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말글빛냄, 321)

이 땅에 존재하는 정치적 구조 중에 그나마 민주주의가 가장 인간에게 그럴듯한 선에 가까운 ‘_ism’이라고 혹자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너선 색스는 민주주의라는 ‘_ism’에서 가장 염려하고 경계해야 할 시류적인 요소를 자본주의라는 괴물로 너무 쉽게 변질되는 당위라고 예상했다. 슬픈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은 언제나 불행하게도 빠르게 성취되는 데 대단히 유감스럽게 색스의 예언자적인 성찰은 예외 없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세계자본주의는 인간의 처지를 어마어마하게 개선할 가능성을 불러왔지만, 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불평등과 야만주의를 심화시킬 가능성도 가져왔다.”(위의 책, 같은 페이지)

교회는 바로 이 무시무시한 괴물과 맞서야 할 대척점에 서 있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다. 더불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 땅의 유일한 공동체이다. 이 말은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천박한 자본주의의 사탄적인 행태들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맞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필자는 아주 오래 전, 쟈크 엘륄의 충고를 가슴에 담았던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것은 낙원이 아니라 살만한 세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의 영역에 투신하는 것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의 대립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무질서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보존 질서 사이의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나라를 도래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의 좋은 소식을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쟈크 엘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 대장간, 52.)

엘륄의 이 일갈을 품고 나는 지난 세월 목양의 현장을 뛰었다. 자본주의 체계 안에 세워진 지역 공동체 교회 목사로 섬기고 있기에 이 방향성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치려했고, 마음을 다잡이하려고 몸부림쳤다.
설교를 해야 운명이 목사에게 있다. 듣는 자가 있어도 해야 하고, 없어도 해야 하는 것이 목사의 숙명이다. 하지만 적어도 신학적 방향성에서 올곧은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설교하는 내게 그러지 말 것을 종용하며 죽비를 내리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들리는 설교를 듣는 일이었다. 아, 물론 들리는 설교란 뇌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의미하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만드는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방향성을 잡아주는 설교다. 필자는 목회의 현장에서 영적으로 피폐해지지 않기 위해 김기석 목사의 글에 천착했다. 왜? 그의 설교가 들리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절에서 바울이 토로한 ‘로기켄 라트레이안’ 즉 영적 예배(reasonable service)’로 진입하게 해준 유일한 목회 선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에게 천착한 산물로 탄생한 것이 필자가 2018년에 출간한 2번째 졸저인 『김기석 글 톺아보기』 (2018, 동연 간)다. 
〈말씀 등불 밝히고〉의 네 번째 파트인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등 총 다섯 편에 해당하는 저자의 설교문에 대한 북-리뷰를 남긴 대구성서아카데미원장인 정용섭 목사는 리뷰에 이렇게 글감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김 목사를 앞으로 어떻게 쓰실지 모르겠으나 그의 설교를 계속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 노후에 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213)”

이게 어찌 정용섭 목사만의 기도이겠나 싶다. 필자도 같은 마음으로 중보 한다. 
첫 번째 이야기 나눔의 분량은 8-323페이지다. 목차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예레미야 애가’까지다. 25권 설교의 분량 역시 만만치 않은 양이고 나누고 싶은 고갱이도 지천이다. 해서 이 내용을 지면에 담기는 대단히 부담스럽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자들에게 미친 분량에 대한 섬뜩함(?)이 있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것이 저자의 기막힌 성서 해석과 그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도록 돕는 레마를 내 것으로 만드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이제 몇 가지만 나누어 보자.

1) 인트로의 탁월성이다. 

필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 항상 같은 패러다임으로 원고를 작성한다. 제일 먼저 구성하는 것은 INTRO 구성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설교 원고 작성에서 가장 힘든 작업이다. 단순하게 설교에 집중하도록 회중들을 유인하는 시도가 인트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의 서두에 기록하는 것이지만 본문 해석에 대한 설교의 결론과도 같은 논지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 인트로다. 저자의 설교를 읽다보면 이 인트로가 예사롭지 않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소회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인문학적인 공통분모에서 인트로의 말머리를 찾는다. 그래서 그런지 인문학적인 말문 열기는 신선하다. 상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저자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24절기를 인트로에 적용하며 설교하기를 즐겨한다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24절기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너무 따뜻하다는 점이다. 특히 코로나 펜데믹 기간, 적지 않게 아파했던 회중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 펜데믹 기간 동안, 청파교회가 유트브 설교 시청에 있어서 대형교회(?)로 자리매김 했다는 웃픈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해석의 균형이다.

아마도 필자가 김 목사의 설교에 천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 테제가 아닐까 싶다. 얼마 전에 김호경 박사의 인터뷰를 유트브에서 우연히 시청하게 되었다. 그녀는 사회자와 대담하다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비평했다.

“설교자들이 성경을 너무 양심 없이 읽는 것 같다. 조금만 더 정직하고 솔직하게 성경을 읽기만 해도 절대로 할 수 없는 말들을 설교자들이 마구잡이로 내뱉는다. 양심적으로 성경의 여백을 읽도록 했으면 좋겠다.”

양심 없이 읽고 해석하는 이유는 설교자가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양심 없는 설교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예레미야 6:16-21절을 근거로 한 “가던 길을 멈추고 살펴보라”는 설교는 압권이다. 예레미야 7장은 예언서 예레미야 안에 있는 메시지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도전적이며,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는 ‘성전 설교’다. 주전 5세기 말에 유다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었다. 대립하는 세력이기는 했지만 선민 공동체의 한 축이었던 북쪽은 이미 멸망했다. 구체적 정황을 설명하는 구절이 없어서 그렇지 유다 공동체 역시 혹시나 하는 두려움의 극에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미 605년부터 바벨론에서 의해서 유다는 유린되고 있었고, 명실상부 그 화려하고 강력했던 다윗 제국은 막을 내리고 있는 위기의 극점에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유다 백성들은 더 더욱 선민공동체에게 약속되었던 다윗 왕조의 영원성을 붙들고 싶었다. 그 중심적인 축인 궁정 예언자들은 이런 불안에 있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거짓 예언의 소리를 쏟아 부음으로 유다 백성들은 나름 안심할 수 있었다. 반면, 이런 차제에 예레미야의 예언의 소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 반대의 목소리였기에 말이다. 성전을 숨는 일이야 말로 자멸행위고, 그것이 멸망을 유보하거나 방어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예레미야 예언은 서슬이 시퍼런 예언이었기에 유다 민중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당시 국가 권력의 요직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더욱 눈엣가시가 예레미야였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의치 않고 예레미야는 6장 설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예언의 목소리를 서슴없이 전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멸망의 길로 담대히 걷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가던 길을 당장 멈추라고 소리친다. 저자는 표준 새 번역 성경버전을 본문으로 소개한다.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일렀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평안히 쉴 곳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 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렘 6:16, 표준 새 번역)
그렇다. 저자는 이 기록에 따라 이렇게 설교 제목을 선정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살펴보라”
저자는 What did it means?에 천착했다. 텍스트 해석 말이다. 성전 설교와 맞물려 있는 주전 6세기 남 유다의 상황을 적절하게 해석했다. 하지만 저자가 선포한 발군은 What does it means? 즉 콘텍스트에 대한 거침없는 적용이었다.

“멈출 줄 모르는 것이 삶의 병통입니다. 멈추는 순간 누군가 나를 추월하여 갈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는 지쳤으면서도 내쳐 달립니다. (중략) 인생의 과정 또한 똑같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잘 살펴보고, 가장 좋은 길이 어디인지 또 묻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걸어야 하는 길을 여쭈어 보는 반복적 과정입니다.” (308-309) 

이렇게 균형을 잡은 뒤에 김 목사는 들은 설교에 대한 결단을 위해 예배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스스로 삶의 결정권을 건넨다. 강요가 아니다. 결단을 요구한다.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희망은 발이 없어서 누군가가 어깨로 매고 와야 올 수 있습니다. 희망은 예수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이들을 통해 세상에 유입됩니다.” (312)

필자는 이 대목에서 큰 소리로 아멘 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기막힌 신학적 균형에 탄성을 냈다. 목사가 진정성을 갖고 아멘 할 수 있는 설교자가 내 옆에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3)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 영성이 돋보인다.

김 목사의 신학교 스승이었던 민영진 박사는 책의 시작인 모세오경 리뷰의 제목을 이렇게 썼다.

“기승전 예수, 기승전 그리스도” (14)

극단적이고 수구적인 보수주의(오히려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더 잘 어울린다)에 매몰되어 있는 자들이 저자를 공격할 때 빼놓지 않고 무대 위에 올리는 메뉴가 그의 설교에는 십자가가 없다는 공격이다. 필자가 단언하지만 둘 중에 하나다. 첫째, 저자의 설교 원고나 영상을 절대로 보지 않는 자들이기에 할 수 있는 반대를 위한 반대다. 둘째, 십자가 설교가 진짜로 어떤 설교인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한 망발이다.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등 5권 설교 챕터 리뷰를 맡은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최종원 교수는 이렇게 기고했다.

“김기석의 설교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복음이 없다고 딴지를 거는 이들이 있음을 안다. 그의 설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는 값싼 은혜의 언어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본회퍼가 일갈했듯이, 복음은 본질적으로 값비싼 것이다. 제자도는 그런 것이다. 예수가 값싸게 팔리는 작금의 세태에 김기석의 메시지는 ‘평화, 평화로다’하는 세상에 던지는 돌팔매다. 그의 설교는 강해설교라는 이름으로 예수팔이에 급급한 한국교회의 독이 퍼진 우물에 던지는 해독제다.” (276)

저자는 열왕기상 12:6-16절을 토대로 르호보암이 자행한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치세 때 왕에게 직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위태위태한 솔로몬의 치세를 나름 이어가게 하며 선방하게 해주었던 원로들이 제시한 섬김의 정치를 내팽개친다. 오히려 듣기에 좋고 달콤한 멍에와 채찍의 정치를 선택함으로 나라를 쪼개지게 한 원인이었음을 지적한 저자는 텍스트 해석 이후, 탁월한 콘텍스트 해제를 이렇게 이어갔다.

“다른 이들의 어깨에 무거운 멍에를 얹고, 채찍으로 그들을 치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평화는 싹틀 수 없습니다. ‘멍에’와 ‘채찍’이 아니라 ‘십자가’가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너를 위해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자기욕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니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 14:6b)’는 말을 저는 누구든지 십자가를 자기 삶의 원리로 삼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162)

천박한 십자가 선포가 아닌 이렇게도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적 원리를 십자가의 도로 재해석한 저자의 정신을 어찌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싶다. 어찌 이런 십자가 신학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저자를 향하여 그의 설교에 십자가가 없다고 비난할 수 있나 아이러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말씀 등불 밝히고〉
갈 길이 아직 멀다. 하지만 이 지난한 독서 여행을 하고 있는 필자는 행복하다. 읽을 만 한 거리와 들을 만한 내용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마크 A. 놀의 갈파를 읽으면서 밑줄 그은 텍스트가 있다.

“지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지성은 하나님이 우리로 매일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신 영역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정당한 영역이다. 지성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중에 하나이며, 그 몸의 모든 지체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마크 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IVP, 91)

저자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있다.
“하나님, 종에게 지성적 영성을 주옵소서.”
왜냐하면 김기석 목사의 설교는 지성적 영성이 없으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금년 1월에서 저자를 사석에서 만나 교제했다. 이제 목회를 정리하는 필드에 있어 여럿 생각이 많아졌다는 저자가 필자에게 건넨 말의 함의가 무엇인지 나 또한 안다. 그래서 그런지 육체적으로 많이 여위어 있는 저자의 건강이 매우 염려되었다. 나만의 개인적인 욕심인지를 모르겠지만 저자가 떨어뜨리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연명하고 있는 필자를 위해서라도 저자가 잘 버텨주기를 바라며 쓰러지지 않도록 그가 가르쳐 준 대로 그의 건강을 위해 한 번 더 화살기도를 올린다.

하늘 문이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제천세인교회 3층 베란다에서 

이강덕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