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로랑스 드빌레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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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FI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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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7-11 17:0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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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고 (FIKA 간, 2023년) 몇 년 전, 부산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 목사의 딸이 결혼을 해서 1박 2일 부산을 다녀왔다. 제천에서 부산까지 운전하고 가는 건, 운전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 나에게 쥐약인 것을 알기에 하루에 한 번 있는 부산행 완행열차를 타기로 마음먹고 5시간 40분 걸리는 교통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마침 강영안 교수의 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 철학의 초보자들도 읽기 쉽게 저술한 『강 교수의 철학 이야기』를 접해보려 구입해 놓았는데 적기인 것 같아 손에 들고 기차에 탔다. 기차여행 중에 강 교수가 해제한 칸트의 질문 세 가지를 접했다. ⓵ 나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⓶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⓷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 강 교수는 칸트가 제시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철학하기’로 설명하면서 이 세 가지의 질문은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의 물음에 귀결된다고 즉답한 글을 읽으면서 기차의 차창으로 보이는 자연과 글속에 담겨 있는 사유하기를 통해 왠지 모를 행복감에 빠진 근 6시간의 여행을 마친 적이 있다. 요즈음 핫한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아주 딱딱한 철학이야기를 학문적, 이론적으로 해설하는 일체의 행위에서 벗어나 나름의 파격적 글쓰기를 단행하며 철학 이야기를 풍미했다. 소위 ‘바다’는 물론, ‘바다’와 관련된 여러 단어들을 글 무대 위로 올려 그 익숙하거나 생경한 어휘들이 주는 의미를 너무 아름답게 풀어냄으로서 강영안이 말했던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철학적 해답을 책에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한때 내게 철학적 사유함에 불을 지핀 강신주의 말을 인용하자면 ‘철학하기는 감정 살리기다’라고 피력했는데 이 일을 드빌레르가 시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글을 읽다가 24개의 바다 언어들을 먼저 선정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항구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내 어린 시절의 마음 한 구석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던 대단히 익숙한 언어들을 복기해 준 감사 때문이다. 더불어 철학자의 순발력과 지성에 놀란 것은 24가지의 단어들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삶의 가치들을 접목해 주고 있어 경탄의 경탄을 보내고 싶었다. “우리는 라벨과 분류에 저항해야 한다.”(p,42)
바다(sea)와 대양(ocean)이라고 라벨 化하여 무언가를 정의하고 제한하려는 시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저자는 바다와 대양의 의미는 구분하지 않는 게 맞는다고 주장하기 위해 저자가 언급한 말끝의 해제다. 변화무쌍한 인간사, 세상사에 대해 무언가로 정의하는 딱지붙임이 자유로운 해석을 방해하는 획일화이기에 저항해야 한다는 저자의 일갈에 나 또한 부분 동의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걸작을 남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있는 묘비의 글이 이렇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드빌레르가 라벨과 분류에 저항해야 한다는 명제와 카잔차키스의 묘비 글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아마도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기에 그 사유함을 묶어두려는 일체의 전체주의적인 폭력에 대해 저항하려는 인간의 위대함이 공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쫓아다니지 말고 아름다움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감동을 느낄 수 있게 감각을 갈고 닦아야 한다. 세상을 끝없는 말초적 자극과 흥분으로 채우지 말자. 우리가 보고 있는 시간의 분주함으로 채우지 말자. 혼자 있는 시간 자체를 소중히 하고, 고독이 찾아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p,61)
저자는 ‘무인도’를 성찰하며 독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글감을 새기다가 저자가 연이어 말한 문장 한 구절에 꽂혔다.
“비어 있다는 것은 ‘야생’과 동의어다.”(p,58)
AI 시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다.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염려하지 말 것을 종용한다. ‘지니’보다 더 완벽한 요정인 AI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타박한다. 문제는 그래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게 함으로 인간을 정서상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결과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무인도에 정착하면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없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말 그대로 비어 있는 절망적 상태가 무인도다. 하지만 그 절망적 상태와 비어 있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항하려는 힘이 생긴다. 그 능력이 바로 생각하기다. 그렇다. 생각하면 산다. 그래서 절망의 상태지만 야성의 본능이 살아난다. 생각하는 자는 아름다움을 보는 자가 아니라 아름다움 뒤에 있는 더 큰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가 된다. 말초적인 쾌락이 아닌 사유함으로 주어지는 성찰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아주 빈번하게 생각하려는 야생의 본능적 삶을 피하지 말고 즐겨야 한다. 고독이 중요한 이유는 드디어 생각하게 해 주는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자는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생각하는 자는 쇠퇴하지 않는다. 대학원 시절에 진보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가 바울을 무대 역사 위에 등장시켜 생각하는 것을 미래에 대한 사유로 승화시켰던 글을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단히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그의 글을 읽다가 심장에 박혔던 글감이 오롯이 박혀 있다.
“바울은 이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지금은 도리어 밤과 같이 어둡다. 이스라엘도, 세계 다른 민족도 그날을 역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바울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날은 약속된 날이고, 비록 현상적인 세계는 역행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날을 오게 하고 말 것이다. 바울은 그날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믿음으로 앞당겨 보았다.” (안병무, “역사와 해석”,p,239.)
“생각하는 믿음으로 보기”
나는 여타 다른 책에서 생각하기를 믿음으로 재해석한 신학자를 본 적이 없었다. 대단히 신선했다. 그러기에 바울의 이 고백은 대단히 깊은 지성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저자의 또 다른 사유를 접해 보자. “바닷물은 마실 수 없다. 소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 소금은 염소, 나트륨, 황산염, 마그네슘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닷물에는 1리터당 평균 34,5g의 소금이 들어 있다. 바다에 소금이 생긴 것은 약 40억 년 전이다. 세상이 첫 아침을 맞은 날, 그러니까 지구가 탄생할 날부터다. 당시에 엄청 많았던 화산에서 수증기, 가스, 염소, 황산이 계속 품어져 나왔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공기에서 독특한 냄새가 났을 것이다. 이후 약 수 천 년 전에 바다가 생겨나면서 공기에서 배출된 혼합물들이 아래로 쏟아지며 바다 속에 녹아들었다. 이렇게 해서 바다에 소금이 생겼다.” (p,127)
저자는 소금의 역사성을 이렇게 밝힌 뒤에 또 다시 자신의 뜻을 전개한다.
“바닷물을 마셔본 적이 있는가? 바다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해 보았다면 한 번 쯤은 바닷물의 짠 맛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바다는 아주 짜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짠맛을 못 느끼게 된다. 그 맛을 음미하는 능력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행복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과거에 맛 본 만족감을 희미하게 만들고 감흥을 없앤다. 그래서 한때 매력을 느낀 것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관심이 갖지 않는다. (중략) 익숙한 것은 더 이상 탐구하고 새롭게 감상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욕망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순서대로 수그러진다. 그리고 그 대상을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미 손에 넣었기 때문에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위의 책, pp,128-129.)
지난주일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 설교에 이 글을 인용했다. 인용하면서 나는 바닷물이 주는 소금의 ‘짠 맛’을 ‘은혜’라는 단어로 바꾸어 설교했다. 무뎌짐은 각종 문명의 이기인 MSG의 가미로 만들어진다. 조금 더 자극성이 있게 말이다. 조금 더 강한 자극으로 기존의 정상적이었던 맛을 느끼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는 다양한 MSG가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고 있기에 우리는 고유의 맛을, 정말로 중요한 본질이라는 맛을 잃어버렸다. 더불어 잃어버리고 있고, 앞으로 잃어버릴 것이다. 해서 은혜보다 더 강한 것, 자극적인 것을 요구한다. 영적 본질을 거부하고, 그 딴 거 말고, 다른 것을 외친다. 하지만 아는가! 짠 맛보다 더 짠 맛이 없다는 것을. 왜? 짠맛은 그냥 짠 맛이니까. 은혜보다 더 중요한 은혜는 없다. 왜? 은혜는 그냥 은혜니까. 그런데도 왜 현대인들은 맛과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맛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무감각으로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논했지만, 나는 이렇게 단어를 이렇게 바꾼다. 은혜 추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즉 은혜는 사라진 것이 아닌데, 그 은혜가 은혜인지를 모르도록 망가진 ‘내’가 사라진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망가진 내가 다시 살 수 있다.
“세이렌은 시칠리아 섬 부근에 살며 반은 여인이고, 반은 새의 모습을 한 괴물로 알려져 있다. 반인반어의 인어공주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세이렌은 꼬리와 비늘이 없는 대신 발톱과 날개가 있고, 노래를 부르며 선원들을 유혹한다.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선원의 배들은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고, 세이렌은 유유히 선원들을 먹어치운다는 다소 끔찍한 신화다.”(p,230)
이렇게 그리스 신화에 적시된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는 세이렌 이야기가 변색되었다.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에 기록된 착각 보고 때문이다. 거대한 바다의 포유류인 ‘바다 암소’라고 불리는 ‘해우’를 보고 항해하던 자들이 지레 겁먹고 세이렌 마녀라고 착각한 나머지 부풀려져 거짓의 정보가 진실의 이야기로 호도된 것이 바로 세이렌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다. 드빌레르는 이렇게 변질된 세이렌 내레이션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거짓은 전염성이 강하다. 진실보다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거짓은 반복적으로 퍼져나가며 의식과 말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고, 시류에 맞는 것을 쉽게 믿는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의지는 오염되고 썩는다. 확신할수록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고 완고하며, 의문을 품지 않고 다 아는 체 하고, 언제나 이해하는 체 한다. 선동된 여론은 대체로 신중하지 않으나 대세인 의견일수록 우리 마음에 쉽게 와 닿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바람이고, 퍼뜨리는 것이다.”(p,233)
저자의 글을 읽다가 문득 오롯이 투쟁하게 된 면(面)이 하나 있다. 목사라는 직업은 말하며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통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설교자는 대단히 위험하고 심지어는 악하기까지 한 것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그렇다. 목사처럼 분명하고도 확신에 차며 선동적인(?) 메시지를 전해야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직업군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메시지에 가깝게 부합한 부류인 필자는 목사이기에 나름 당혹스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일반 독자들은 저자가 일설 한 세이렌에 얽힌 사유함에 대해 통쾌하게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이 자명하다. 여기서 목사라는 직을 수행하고 있는 리뷰어의 한 사람으로 반응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렇게 말이다. 목사라는 직군에 있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동의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로 인하여 교회와 세속 공동체에게까지 대단히 위험하고 악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목사가 가져야할 자세가 진정성, 정직성, 그리고 진실함이라는 것을 백번 천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점에 1,000% 동의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신저’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메시지’가 문제라고 딴지를 건다면 동의할 수 없다. 언제나 메시지는 정답이었다. 메시지는 변질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메시지가 담고 있는 본질은 변색되지 않는다. 메신저가 변질 될 뿐이지. 산상수훈의 기록 중에 수절(秀節)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5:13-14절은 말하는 메신저에 의해 이렇게 포장되어 약해질 수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메시지를 축소하면 실수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책임론에서 나름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못 박는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NIV Matt 5:13-14)
소위 말하는 빼박(?)이다.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기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산상에서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결정론적인 수훈을 다른 그 무언가로 포장하거나 틈새를 주어 말재주나, 말장난으로 약화시키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전술했듯이 메신저가 수훈을 변질시키는 고약한 짓을 한다고 해서 메시지까지 변질시키거나 부인하는 일이 있다면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가 강력하게 충고하고 있는 세이렌의 얽힌 사유함도 철학적인 사유로 매듭 짓지 않고, 신학적인 질문에 맞는 귀결점을 찾는 것이 옳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자가 사유한 빼어난 철학적 정답 제시의 대목에서 읽는 내내 불편했고, 조금 더 나아가 불쾌하기까지 했던 대목이 있어 남기고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취향, 내가 싫어하는 것, 나만의 생각,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의 추억, 가끔 드러내는 나의 꿈, 아니면 나의 행동, 내가 한 약속,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노력?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나는 나다워진다.” (p,104)
“이러한 성스러운 닻을 알아보고 의지하려면 은총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돕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p,190)
이런 통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세속의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달라이라마가 뉴욕에 있는 센트럴 파크에서 설법한 내용은 이러했다.
“그대의 외부에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가 있다면 그대의 내부에 있는 내적 마음이다.”(이재철, “비전의 사람”, 홍성사, p,46)
어떻게 이런 설법에 21세기 지성을 추구하는 자들이 열광하지 않으랴 싶다. 하지만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저자가 말한 나 자신에게 은총을 주고 나를 돕는 자는 ‘나’라는 메시지에 머리를 끄덕일 수 없다. 왜? 나는 나에게 하루에도 수없이 내적 마음에서 이렇게 토로하기 때문이다.
“너도 틀릴 수 있어, 네가 틀렸어!”
아주 교묘하고 능숙하게 훈련된 목사의 스킬로 나를 낮추면서 나를 높이려는 말질이 아니다. 이게 진정성이 있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나를 돕는 최고의 파트너가 ‘나’라는 가르침에 동의하라는 것은 또 다른 압박이요 지성적 폭력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일찍이 이렇게 교훈했다.
“인간본성은 칭찬과 명성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 이상의 보상을 구하지 않으며 허무한 박수갈채에 무관심하다.” (토마스 아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브니엘, p,75.)
이게 정상적 신앙의 고백이다. 나는 나의 마음의 내, 외부의 창조주가 있음을 믿는다. 그분은 나를 지으시고, 나의 이름을 아시기에 인격적으로 날마다 오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
글을 빠져 나가고자 한다. 드빌레르가 지성적 성찰과 발군의 혜안으로 삶의 지혜를 준 글을 읽으며 많은 공부를 했다. 동시에 또 하나의 지혜의 샘을 퍼 올린 것 같은 행복한 독서 시간을 가졌다. 신앙인으로서 선별적인 적용이 가능하다면 이 책을 접해보는 것은 행복한 글 여행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학적이지 않은 세속적 스펙트럼을 발군의 학자의 말이라고 모두 수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메신저’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메시지’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니까. |